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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지옥만세 bouquins Ennui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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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기억의 자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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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mmary type="text/plain"><![CDATA[ 기타노 다케시의 &lt;돌스&gt;에서 귤을 미끼로 쓴 낚싯줄에서 고기가 입질을 하는 장면이 있다. 사랑은 아무도 돌보지 않던 우연으로, 얼토당토않은 것들을 이유로 진동하기 시작한다. 모든 사랑의 사실적인 핵심은 우발적이다. 엄청난 우연이 그와 그의 연인을 묶지 않았던가? 여기에서부터 거꾸로 가야 한다. 그러자면 그가 선택한 기억에서, 선택해서 남겨둔 기억에서 ‘추억’이라고 불릴만한 것들을 끄집어야 한다. 추억에도 속도라는 것이 있다며 그는 아주 드물게 그 속도라는 것을 감지한다고 했다. 이응준의 소설집 &lt;달의 뒤편으로 가는 자전거 여행&gt;에서 처음 “추억의 속도”라는 말을 만났다. ‘보았다’나 ‘읽었다’가 아니라, 만났다. 그 말에서 ‘사랑’ 역시도 낯설고 큰 우연에 둘려 시작되었다는 것을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했고, 그 시작이 종국에는 추억이라는 소실점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소실점 뒤는 보이지 않고 떠오르지 않는다.고 믿게 되었다. 그렇게 애써 떨친 추억의 속도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은 나희덕의 시 ‘기억의 자리’에서였다. 어렵게 멀어져간 것들이다시 돌아올까봐나는 등을 돌리고 걷는다추억의 속도보다는 빨리 걸어야 한다이제 보여줄 수 있는 건뒷모습뿐, 눈부신 것도등에 쏟아지는 햇살뿐일 것이니도망치는 동안에만 아름다울 수 있는길의 어귀마다여름꽃들이 피어난다, 키를 달리하여수많은 내 몸들이 피었다 진다시든 꽃잎이 그만피어나는 꽃잎 위로 떨어져 내린다휘청거리지 않으려고걷는다, 빨리, 기억의 자리마다발이 멈추어선 줄도 모르고예전의 그 자리로 돌아온 줄도 모르고기억의 자리 - 나희덕 나는 퍽 오랫동안 등을 돌리고 걸었다. 점점 덮쳐오는 추억보다 빨리 걸어야 한다며 뒤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더는 반복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다지며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렇게 오래 걸어서 추억이 마음과 기억의 자리에서 충분히 멀어졌다며 안도했을 때, 무심코 앞을 보았다. 그 앞에 내 발자국이 선명하게 보였다. 돌고 한참을 돌아 그 자리에서 다시 섰다. 발자국마다 하나의 기억들이 움푹 패 있었다. 조금씩 깊이가 다른 걸로 봐서 기억이라는 것도 무게를 가진 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말의 무게였다. 기억의 자리마다 말들이 스미어 사과나무가 싹을...]]></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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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ATA[<div style="padding-right: 15px; padding-left: 5px; float: left; padding-bottom: 10px; padding-top: 0px"><a href="http://antimine.kr/pic/0111.jpg" onclick="return hs.expand(this)" title="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id="thumb2" class="highslide"><img width="200" src="http://antimine.kr/pic/0111.jpg" alt="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a></div>

<p>기타노 다케시의 &lt;돌스&gt;에서 귤을 미끼로 쓴 낚싯줄에서 고기가 입질을 하는 장면이 있다. 사랑은 아무도 돌보지 않던 우연으로, 얼토당토않은 것들을 이유로 진동하기 시작한다. 모든 사랑의 사실적인 핵심은 우발적이다. 엄청난 우연이 그와 그의 연인을 묶지 않았던가? 여기에서부터 거꾸로 가야 한다. 그러자면 그가 선택한 기억에서, 선택해서 남겨둔 기억에서 ‘추억’이라고 불릴만한 것들을 끄집어야 한다.  </p>

<p>추억에도 속도라는 것이 있다며 그는 아주 드물게 그 속도라는 것을 감지한다고 했다. 이응준의 소설집 &lt;달의 뒤편으로 가는 자전거 여행&gt;에서 처음 “추억의 속도”라는 말을 만났다. ‘보았다’나 ‘읽었다’가 아니라, 만났다. 그 말에서 ‘사랑’ 역시도 낯설고 큰 우연에 둘려 시작되었다는 것을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했고, 그 시작이 종국에는 추억이라는 소실점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소실점 뒤는 보이지 않고 떠오르지 않는다.고 믿게 되었다. 그렇게 애써 떨친 추억의 속도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은 나희덕의 시 ‘기억의 자리’에서였다. </p>

<div style="margin:10px; padding:10px; border: 1px dotted #ccc; color:  rgb(33, 85, 107); background: #efefef;">어렵게 멀어져간 것들이<br />다시 돌아올까봐<br />나는 등을 돌리고 걷는다<br />추억의 속도보다는 빨리 걸어야 한다<br />이제 보여줄 수 있는 건<br />뒷모습뿐, 눈부신 것도<br />등에 쏟아지는 햇살뿐일 것이니<br />도망치는 동안에만 아름다울 수 있는<br />길의 어귀마다<br />여름꽃들이 피어난다, 키를 달리하여<br />수많은 내 몸들이 피었다 진다<br />시든 꽃잎이 그만<br />피어나는 꽃잎 위로 떨어져 내린다<br />휘청거리지 않으려고<br />걷는다, 빨리, 기억의 자리마다<br />발이 멈추어선 줄도 모르고<br />예전의 그 자리로 돌아온 줄도 모르고<br /><br />기억의 자리 - 나희덕</div>

<p>나는 퍽 오랫동안 등을 돌리고 걸었다. 점점 덮쳐오는 추억보다 빨리 걸어야 한다며 뒤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더는 반복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다지며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렇게 오래 걸어서 추억이 마음과 기억의 자리에서 충분히 멀어졌다며 안도했을 때, 무심코 앞을 보았다. 그 앞에 내 발자국이 선명하게 보였다. 돌고 한참을 돌아 그 자리에서 다시 섰다. 발자국마다 하나의 기억들이 움푹 패 있었다. 조금씩 깊이가 다른 걸로 봐서 기억이라는 것도 무게를 가진 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말의 무게였다. 기억의 자리마다 말들이 스미어 사과나무가 싹을 피우듯 조용히 자라고 있었다. 내가 지불한 말들이 발자국 언저리에서 자라고 있었다. 길은 반복되어도 다시 낯선 풍경으로 펼쳐졌다. 그 길에서 ‘사랑’이, 무수한 ‘우연’이 ‘또’ 시작되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p>

<p>‘삶은 왜 내가 던진 돌멩이가 아니라 그것이 일으킨 물무늬로서 오는 것이며 한줄기 빛이 아니라 그 그림자로 오는 것일까’, 거스름돈 같은 것이 사랑이다. 무언가를 계속 지불하고 ‘몇개의 동전이 주머니에서 쩔렁’거리며 ‘아프게 나를 깨우’는 소리만 들려오는 것. 그리고 추억이 속도를 더할 때 소리는 그치지 않고 계속 아프게 귓가를 찌른다. ‘삶을 받은 것은 무언가 지불했기 때문’이라는데, 사랑은 그렇게 항상 결핍된 존재로만 오나 보다. 그 추억 어디쯤에 말들은 이제 무성해져 사과 한 알은 열렸을까?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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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사랑, 우아한 부패</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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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dified>2009-02-15T11:47:22Z</modified>
<issued>2008-12-11T10:39:45Z</iss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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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mmary type="text/plain"><![CDATA[ 러브콜을 받는다는 건 자신의 가치에 대한 부름이다. 그를 필요로 하는 곳에 가게 되는 것. 그가 백화점의 일류 고객이어서 바겐세일 전에 이득을 챙기는 것이든, ‘꼭 당신이어야 해요. 당신이 아니면 안 돼요.’라는 간곡함으로 어떤 소임을 수행하는 것이든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의 대상에게 무엇인가를 헌정하는 실제적인, 내적인 온갖 몸짓’ 롤랑 바르트는 이것을 ‘헌사(dédicace)’라고 말한다. ‘러브콜’은 ‘사랑’의 자리를 교묘하게 ‘필요’로 대체하면서 헌사의 에피소드를 이어간다. 필요하니깐 부르는 것이다. 사랑을(love) 부르짖으면서(call) 아이러니하게도 ‘사랑’의 오랜 속성을 배제한다. &lt;어린 왕자&gt;에서 여우는 “당신은 당신이 길들인 장미를 영원히 책임져야 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하지만 ‘러브콜’은 ‘영원’을 ‘순간’으로 모면하면서 더는 책임 따위가 사랑의 속성이 아니라고 단정 짓는다. ‘구애(求愛-love call)가 끝나는 순간 애(愛)는 따라서 소실’된다. 그러나 구애 이후 또 다른 사랑을 믿는 사람에게, 즉 ‘사랑에 빠진’ 이에게 “시작하지 않을 수는 있으나 끝낼 수는 없는 것, 바로 그것이 구애”라는 김영민의 말은 매혹적이다. 그 스스로 ‘사랑이 심리학이 되는 순간 부패하기 마련’이라지만, 흔해빠져 널리고 널린 사랑. 하다못해 길에서조차 넘쳐 반라의 전단이 발길에 차이며, ‘사랑’이 더는 담론의 영역에서 머물지 못하는 때에 사랑의 심리학은 얼마나 우아한 부패인가. 무릇 연인은 늘, "사랑하는 것만큼 사랑받지 못한다."는 결여에 시달리는 법이다. 그 시달리는 방식은 은밀하고 집요하다. 수동과 능동의 정서가 변덕스럽게 교차하면서 양철판을 긁듯이 간지럽힌다. &lt;사랑, 그 환상의 물매&gt;에서 김영민은 반복의 구조를 유지하는 사랑의 메커니즘을 '물매(기울기)'라는 용어를 빌어 설명한다. 사랑의 출발은 시소를 타는 것처럼 타자와 내가 비슷한 무게중심을 가지고 끊임없이 움직여야 가능하다.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져서 꿈쩍도 안 한다면 시작은 됐지만 이어질 수 없다. 나보다 우위에 있으며 내게서 떨어진 타자로부터 나는 떨어지지 못하기 마련이다. 균형 속에서 동시에 매 순간 놀이를 지속하겠다는 의지도 함께 작용한다. 이러한 물매의 반복으로 ‘자의성’은 잊히고 기억은 타자가 나보다...]]></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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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ATA[<div style="padding-right: 15px; padding-left: 5px; float: left; padding-bottom: 10px; padding-top: 0px"><a href="http://antimine.kr/pic/love-2.jpg" onclick="return hs.expand(this)" title="사랑 그 환상의 물매" id="thumb2" class="highslide"><img width="200" src="http://antimine.kr/pic/love-2.jpg" alt="사랑 그 환상의 물매" /></a></div>

<p>러브콜을 받는다는 건 자신의 가치에 대한 부름이다. 그를 필요로 하는 곳에 가게 되는 것. 그가 백화점의 일류 고객이어서 바겐세일 전에 이득을 챙기는 것이든, ‘꼭 당신이어야 해요. 당신이 아니면 안 돼요.’라는 간곡함으로 어떤 소임을 수행하는 것이든 말이다. </p>

<p>‘사랑하는 사람이 사랑의 대상에게 무엇인가를 헌정하는 실제적인, 내적인 온갖 몸짓’ 롤랑 바르트는 이것을 ‘헌사(dédicace)’라고 말한다. ‘러브콜’은 ‘사랑’의 자리를 교묘하게 ‘필요’로 대체하면서 헌사의 에피소드를 이어간다. 필요하니깐 부르는 것이다. 사랑을(love) 부르짖으면서(call) 아이러니하게도 ‘사랑’의 오랜 속성을 배제한다. &lt;어린 왕자&gt;에서 여우는 “당신은 당신이 길들인 장미를 영원히 책임져야 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하지만 ‘러브콜’은 ‘영원’을 ‘순간’으로 모면하면서 더는 책임 따위가 사랑의 속성이 아니라고 단정 짓는다. ‘구애(求愛-love call)가 끝나는 순간 애(愛)는 따라서 소실’된다. </p>

<p>그러나 구애 이후 또 다른 사랑을 믿는 사람에게, 즉 ‘사랑에 빠진’ 이에게 “시작하지 않을 수는 있으나 끝낼 수는 없는 것, 바로 그것이 구애”라는 김영민의 말은 매혹적이다. 그 스스로 ‘사랑이 심리학이 되는 순간 부패하기 마련’이라지만, 흔해빠져 널리고 널린 사랑. 하다못해 길에서조차 넘쳐 반라의 전단이 발길에 차이며, ‘사랑’이 더는 담론의 영역에서 머물지 못하는 때에 사랑의 심리학은 얼마나 우아한 부패인가. </p>

<div style="margin:10px; padding:10px; border: 1px dotted #ccc; color:  rgb(33, 85, 107); background: #efefef;">무릇 연인은 늘, "사랑하는 것만큼 사랑받지 못한다."는 결여에 시달리는 법이다. 그 시달리는 방식은 은밀하고 집요하다. 수동과 능동의 정서가 변덕스럽게 교차하면서 양철판을 긁듯이 간지럽힌다.</div>

<p>&lt;사랑, 그 환상의 물매&gt;에서 김영민은 반복의 구조를 유지하는 사랑의 메커니즘을 '물매(기울기)'라는 용어를 빌어 설명한다. 사랑의 출발은 시소를 타는 것처럼 타자와 내가 비슷한 무게중심을 가지고 끊임없이 움직여야 가능하다.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져서 꿈쩍도 안 한다면 시작은 됐지만 이어질 수 없다. 나보다 우위에 있으며 내게서 떨어진 타자로부터 나는 떨어지지 못하기 마련이다. 균형 속에서 동시에 매 순간 놀이를 지속하겠다는 의지도 함께 작용한다. 이러한 물매의 반복으로 ‘자의성’은 잊히고 기억은 타자가 나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거나 ‘낮은 위치’에 있다는 비대칭으로, 이는 다시 상처로 자연스럽게 고착된다. 얼핏 기억, 상처, 결여, 비대칭 등등 사랑을 둘러싼 단어들은 치명적인 것들의 집합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다행스럽게도 환상을 통해 적절하게 ‘현실의 수위와 지평’을 조절한다. </p>

<p>그가 자서에서 말하듯 “사랑은 그 무엇보다 그 열정의 기울기에 따른 사소한 차이들의 나르시시즘이다. 현실의 물매가 환상을 낳고 그 환상의 물매는 사랑을 번성케 하는 법. 현실과 환상이 겹치는 만큼 당신은 어제처럼 내일도 사랑할 것”이다. 그치지 않고 삐거덕거리는 시소음, 그것이야말로 ‘끝낼 수 없는’ 구애이다. <br />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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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밑줄을 긋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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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dified>2009-02-15T02:12:56Z</modified>
<issued>2008-10-09T15:38:45Z</iss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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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mmary type="text/plain"><![CDATA[ 책장에서 아무 책이나 꺼내고는 이 책 어디에 밑줄을 그었을까 들춰본다. 짚이는 대로 빼어 든 게 배수아의 &lt;독학자&gt;이다. 독학자라니, 이왕이면 카롤린 봉그랑의 &lt;밑줄 긋는 남자&gt;정도가 손에 잡혔으면 줄거리만 가지고도 충분한 이바구가 됐을 걸. 한 때는 책을 신줏단지 모시듯 하면서 밑줄 긋기를 꺼렸다. 그냥저냥 낙서로 여겼을 뿐이며 어떤 밑줄은 넘어오지 말라는 선으로 다가와 그쯤에서 책을 덥기도 했다. 그러던 것이 헌책방을 다니면서 점점 낯모르는 이들의 밑줄을 쫓는 재미를 알았고, 조금 더 지나서는 자를 대지 않고도 찍찍 밑줄을 만드는 게 아무렇지도 않게 됐다. &lt;독학자&gt;를 보자면 몽상은 관념에 뿌리를 내리고 숙주처럼 기생한다. 둘은 동전의 양면처럼 떼려야 뗄 수 없지만 한순간에 선명하게 나뉜다. ‘독학자’는 독한자이다. 흡사 박일문의 &lt;살아남의 자의 슬픔&gt;에 나오는 모든 책을 다 읽겠다는 이처럼 여겨진다. 그 끝에 다다라서는 대체 몽상가이거나 관념론자가 되는 수 말고 다른 게 있을까. 물론 덕후(オタク)가 될 수도 있다. '나는 책을 통해서 많은 죽음을 읽었다. 그러나 어느 책에서도 그녀가 우리에게 보여준 것과 같은 태도는 읽지 못했다.' 이것이 독학자의 비운이다. 소설의 '내'가 '그려낸' 마흔을 위한 '팬터지', 그 지난한 밤과 주말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나는 어쩌다가 심심함이 지나쳐 죽을 것 같은 날에만 책을 본다. 게다가 대체로 혼자 잘 노는 까닭에 그닥 심심해하지 않고, 그러다 보니, 책은 일 년에 채 열 권을 읽지 않는다. '그리하여 마흔 살까지는 어떤 영감을 받더라도, 독후감 이상의 것은' 쓸 수 없다. '쓰지 않겠다'와 '쓸 수 없다' 이것이 소설의 '나'와 나의 가장 큰 차이이다. 이쯤에서 다행인 건 &lt;독학자&gt;에서 밑줄을 발견한 것이다. 단 한 곳이지만. '인생은 내가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그 스스로를 표현할 것'이라는 P교수의 근사한 말도 아니고, '나'의 노동과 삶, 혹은 마흔에 대한 멋들어진 독백도 아니다. 지울 수조차 없게...]]></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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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subject>Ennui</dc:subj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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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ATA[<div style="padding-right: 15px; padding-left: 5px; float: left; padding-bottom: 10px; padding-top: 0px"><a href="http://antimine.kr/pic/20081010.jpg" onclick="return hs.expand(this)" title="독학자" id="thumb2" class="highslide"><img width="200" src="http://antimine.kr/pic/20081010.jpg" alt="독학자" /></a></div>
책장에서 아무 책이나 꺼내고는 이 책 어디에 밑줄을 그었을까 들춰본다. 짚이는 대로 빼어 든 게 배수아의 &lt;독학자&gt;이다. 독학자라니, 이왕이면 카롤린 봉그랑의 &lt;밑줄 긋는 남자&gt;정도가 손에 잡혔으면 줄거리만 가지고도 충분한 이바구가 됐을 걸.   

<p>한 때는 책을 신줏단지 모시듯 하면서 밑줄 긋기를 꺼렸다. 그냥저냥 낙서로 여겼을 뿐이며 어떤 밑줄은 넘어오지 말라는 선으로 다가와 그쯤에서 책을 덥기도 했다. 그러던 것이 헌책방을 다니면서 점점 낯모르는 이들의 밑줄을 쫓는 재미를 알았고, 조금 더 지나서는 자를 대지 않고도 찍찍 밑줄을 만드는 게 아무렇지도 않게 됐다. </p>

<p>&lt;독학자&gt;를 보자면 몽상은 관념에 뿌리를 내리고 숙주처럼 기생한다. 둘은 동전의 양면처럼 떼려야 뗄 수 없지만 한순간에 선명하게 나뉜다. ‘독학자’는 독한자이다. 흡사 박일문의 &lt;살아남의 자의 슬픔&gt;에 나오는 모든 책을 다 읽겠다는 이처럼 여겨진다. 그 끝에 다다라서는 대체 몽상가이거나 관념론자가 되는 수 말고 다른 게 있을까. 물론 덕후(オタク)가 될 수도 있다. '나는 책을 통해서 많은 죽음을 읽었다. 그러나 어느 책에서도 그녀가 우리에게 보여준 것과 같은 태도는 읽지 못했다.' 이것이 독학자의 비운이다. </p>

<p>소설의 '내'가 '그려낸' 마흔을 위한 '팬터지', 그 지난한 밤과 주말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나는 어쩌다가 심심함이 지나쳐 죽을 것 같은 날에만 책을 본다. 게다가 대체로 혼자 잘 노는 까닭에 그닥 심심해하지 않고, 그러다 보니, 책은 일 년에 채 열 권을 읽지 않는다. '그리하여 마흔 살까지는 어떤 영감을 받더라도, 독후감 이상의 것은' 쓸 수 없다. '쓰지 않겠다'와 '쓸 수 없다' 이것이 소설의 '나'와 나의 가장 큰 차이이다. 이쯤에서 다행인 건 &lt;독학자&gt;에서 밑줄을 발견한 것이다. 단 한 곳이지만. '인생은 내가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그 스스로를 표현할 것'이라는 P교수의 근사한 말도 아니고, '나'의 노동과 삶, 혹은 마흔에 대한 멋들어진 독백도 아니다. 지울 수조차 없게 초록 색연필로 찍하고 그어진 밑줄.  </p>

<div style="margin:10px; padding:10px; border: 1px dotted #ccc; color:  rgb(33, 85, 107); background: #efefef;"> "범죄자는 자신의 행위를 분석하고 이해하고 더 낫게 만들기 위해서 사고 안에서 자신의 행위를 반복해서 다시 세우고 그리고 그것을 치밀하게 기록하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반복해서 범죄를 저지르는 편을 택한다. 범죄자는 그 행위, 범죄로부터 오직 도피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도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망각이며, 망각으로 가는 가장 확실한 지름길은 반복을 통한 무의식화이기 때문이다." </div>

<p>참을 수 없을 만치 그에게 이 밑줄을 들이밀고 싶다. 이런 걸 달리 습관이라고 하자. 범죄자의 습관이건, 페미니스트의 습관이건, 설사 '고도'를 기다리는 습관이라 해도 무의식적인 반복은 귀와 눈을 멀게 한다.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것에서 시작된 도피는 조금 지나서는 자기를 망각하는데 이른다. 결국엔 스스로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없게 된다. 그래서 그치는 무슨 말과 행동을 했든 간에 그리 뻔뻔해질 수 있었던 걸까.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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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아드리(adli)를 떠나는 사람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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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dified>2010-02-10T18:35:07Z</modified>
<issued>2008-09-09T08:52:02Z</issued>
<id>tag:antimine.kr,2008://1.752</id>
<created>2008-09-09T08:52:02Z</created>
<summary type="text/plain"> 참을 수 없는 것, 이라고 써놓고 내내 딴 짓이다. 내게 참을 수 없는 것은 뭐가 있을까. 재미없는 책? 오토바이 소음? 버스에서 누군가의 통화로 낯모르는 이의 한 생애를 줄줄 꾀게 되는 상황? 마감을 초 앞에 둔 글쓰기조차도 곧 원고지 몇 장을 채우고는 덮을 테니 그리 큰 문제는 아니다. 이 정도는 이전 직장의 그들보다는 훨씬 참을 만하다. 오래 담아둔 이야기가 있다. 하룻밤을 푹 자도 잊히지 않고, 한 달이 지나도, 반년이 훌쩍 넘어도 가시지 않는 것. 이쯤 되면 참을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 내가 견딜 수 없는 그것은 현실에서 만난 오멜라스다. 어슐러 k. 르귄의「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에서 ‘오멜라스’는 살렘(오리건)-Salem(Oregon)을 거꾸로 읽은 것이다. 그 오멜라스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 우리가 아드리(adli)를 떠난 것처럼 더는 참을 수 없어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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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antimine</name>
<url>http://antimine.kr</url>
<email>antimine.kr@gmail.com</ema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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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subject>Ennui</dc:subj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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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ATA[<div style="padding-right: 15px; padding-left: 5px; float: left; padding-bottom: 10px; padding-top: 0px"><a href="http://antimine.kr/pic/the_winds_twelve_quarters.jpg" onclick="return hs.expand(this)" title="바람의 열두 방향" id="thumb2" class="highslide"><img width="200" src="http://antimine.kr/pic/the_winds_twelve_quarters.jpg" alt="바람의 열두 방향" /></a></div>
참을 수 없는 것, 이라고 써놓고 내내 딴 짓이다. 내게 참을 수 없는 것은 뭐가 있을까. 재미없는 책? 오토바이 소음? 버스에서 누군가의 통화로 낯모르는 이의 한 생애를 줄줄 꾀게 되는 상황? 마감을 초 앞에 둔 글쓰기조차도 곧 원고지 몇 장을 채우고는 덮을 테니 그리 큰 문제는 아니다. 이 정도는 이전 직장의 그들보다는 훨씬 참을 만하다. <!--누군가를 끊임없이 비난하는 바람에 이어폰을 꽂아야만 하는 곤혹스러움이란.--> 

<p>오래 담아둔 이야기가 있다. 하룻밤을 푹 자도 잊히지 않고, 한 달이 지나도, 반년이 훌쩍 넘어도 가시지 않는 것. 이쯤 되면 참을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 내가 견딜 수 없는 그것은 현실에서 만난 오멜라스다. 어슐러 k. 르귄의「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에서 ‘오멜라스’는 살렘(오리건)-Salem(Oregon)을 거꾸로 읽은 것이다. 그 오멜라스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 우리가 아드리(adli)를 떠난 것처럼 더는 참을 수 없어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 </p>]]>
<![CDATA[<p>어슐러 k. 르귄의 소설은 건조하지만 메말라 있지 않다. 스릴이 넘치는 것도 교감신경을 자극하는 것도 아니지만, 천천히 따라가다 보면 나중에 ‘아’하고 감탄해 버리는 그런 소설들이다. 당신에게도 참을 수 없는 오멜라스가 있을지 모르겠다. 아니면 모르는 척하며 여전히 오멜라스에서 살고 있을 수도 있다. 이면을 알기 전에는 퍽 괜찮다고 생각해 온 곳. 내게는 이전에 일하던 아드리(adli)라는 곳이 꼭 그랬다.   </p>

<p>오멜라스는 얼마나 멋진 이상향인가? 성직자 없이도, 군인 없이도 잘 살 수 있는 곳. 진실을 보기 전까지 누구든 부러워할 만한 곳이다. 오멜라스의 가장 외진 곳 지하에는 한 아이가 버려진 채로 고통받고 있다. 아이가 비참해지면 질수록 오멜라스의 겉보기는 더 화려해진다. 사람들 사이의 따뜻한 정, 풍성한 수확과 온화한 날씨. 그 모든 것은 아이의 처절함과 정반대에 선다. 진실은 오멜라스의 주민이라면 누구나 알아야 하고 알게 된다. 그리고 선택해야 한다. 어떤 이들은 직접 겪고도 ‘설마, 그럴 리가’라며 애써 덮고, 어떤 이들은 그런 것쯤은 ‘사소하다’며 계속 오멜라스를 누린다. 혹은 떠나는 이들에게 ‘대체 당신들이 생각하는 오멜라스는 뭔데?’라는 비난을 던진다. </p>

<div style="margin:10px; padding:10px; border: 1px dotted #ccc; color:  rgb(33, 85, 107); background: #efefef;">“.......고통스럽다면 반복하라! 그러나 절망을 찬양하는 행위는 기쁨을 비난하는 행위이며, 폭력을 용인하는 행위는 그 밖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행위이다. 더는 할 말이 없다. 더는 행복한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으며 즐거움을 축복할 수도 없다........” </div>

<p>어떤 이유에서든 몇몇은 오멜라스를 떠난다. 우리가 아드리(adli)를 떠나듯 하루나 이틀 정도 침묵에 잠겨 있다가 떠나기도 하고, 여자이든 남자이든 상관없이 떠난다. 넷이 함께 떠나기도 한다. 그 사람들은 오멜라스를 떠나 다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은 자신이 가고자 하는 곳을 아는 듯하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은, 그리고 아드리(adli)를 떠나는 사람들은.</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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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무수한 편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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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dified>2009-02-15T02:29:34Z</modified>
<issued>2008-08-09T03:36:37Z</iss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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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mmary type="text/plain"> 김승희는 『왼손을 위한 협주곡』 자서에서 ‘죽은 사람은 하나의 不在가 아니라 무수한 遍在’라고 말한다. 사진에 대해 얘기하면서 죽음을 꺼내는 게 뜬금없어도 이 말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사진’이다. 죽음 혹은 사라진 것들, 기억에서 망각된 것들을 끄집어내는 것은 고통과 찌름으로 연속된 사물들이다. 우리의 마음을 떠난 것을 기억하는 것은 사물이다. 사물은 차츰 기억을 떠올리고 그 안에 투영된 마음까지도 형상화하곤 한다. 그것은 바르트가 말하는 &apos;반과거&apos;이다.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움직이지 않는 매혹의 시제들. 사진은 숙주가 되어 사랑의 정경을, 처음의 황홀했던 순간을 뒤늦게 만들어낸다. 그러나 진실은 ‘토스카의 아리아’처럼 잿빛이다. “별은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행복은 결코 그대로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대로 돌아오지 않는 행복, ‘실존적으로 결코 다시 반복될 수 없는 것을 기계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사진의 특징이다. 롤랑 바르트는 『밝은방』에서 이것을 현상학적으로 풀어낸다. 『밝은방』은 샤르트르의 『상상적인 것』에 경의를 표하는 오마주로 시작한다. 그것의 부제는 ‘상상력에 관한 현상학적 연구’이고 롤랑 바르트는 현상학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 사진을 찍은 이의 입장을 철저하게 배제하며 사진에 대해서만 집중한다. 현상학에서 말하는 에포케가 그의 눈을 통해 얼렁뚱땅 실현되는 것이다. 그러니깐 나폴레옹의 막냇동생 제롬의 사진을 보고서, “나는 황제를 보았던 두 눈을 보고 있다”는 놀라움을 마음껏 표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사진의 미덕이다. 그냥 관람자가 되는 수밖에 없다. 굳이 바르트의 용어를 빌리자면 ‘스투디움(studium)-나는 좋아한다’으로, 사진을 보는 것으로 충분히 즐거움을 가지는 것에 만족해야 한다. ‘푼크툼(punctum)-나는 사랑한다&apos;에 현혹된다면 사진은 이제부터 부재하던 것이 편재되는 매개이다. 그 기억들. 내 정신을 헤집던 것들. 다시 움트는 상처로, 온통 푸른 멍으로 몸은 또다시 옹송크려질 것이다. 슬픈 영화를 볼 게 아니라 옛 앨범을 뒤적이면 된다는 말이다. 바르트의 시대는 갔고, 누구나 하나쯤 들고 다니는 카메라, 거기에 관련된 책이라면 실은 『밝은방』 같은 게 아니라, ‘포토샵 보정’에 같은...</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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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ATA[<div style="padding-right: 15px; padding-left: 5px; float: left; padding-bottom: 10px; padding-top: 0px"><a href="http://antimine.kr/pic/IMG_9378.jpg" onclick="return hs.expand(this)" title="밝은방" id="thumb2" class="highslide"><img width="200" src="http://antimine.kr/pic/IMG_9378.jpg" alt="밝은방" /></a></div>

<p><br />
김승희는 『왼손을 위한 협주곡』 자서에서 ‘죽은 사람은 하나의 不在가 아니라 무수한 遍在’라고 말한다. 사진에 대해 얘기하면서 죽음을 꺼내는 게 뜬금없어도 이 말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사진’이다. 죽음 혹은 사라진 것들, 기억에서 망각된 것들을 끄집어내는 것은 고통과 찌름으로 연속된 사물들이다. </p>

<p>우리의 마음을 떠난 것을 기억하는 것은 사물이다. 사물은 차츰 기억을 떠올리고 그 안에 투영된 마음까지도 형상화하곤 한다. 그것은 바르트가 말하는 '반과거'이다.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움직이지 않는 매혹의 시제들. 사진은 숙주가 되어 사랑의 정경을, 처음의 황홀했던 순간을 뒤늦게 만들어낸다. 그러나 진실은 ‘토스카의 아리아’처럼 잿빛이다. “별은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행복은 결코 그대로는 돌아오지 않는다.” </p>

<p>그대로 돌아오지 않는 행복, ‘실존적으로 결코 다시 반복될 수 없는 것을 기계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사진의 특징이다. 롤랑 바르트는 『밝은방』에서 이것을 현상학적으로 풀어낸다. 『밝은방』은 샤르트르의 『상상적인 것』에 경의를 표하는 오마주로 시작한다. 그것의 부제는 ‘상상력에 관한 현상학적 연구’이고 롤랑 바르트는 현상학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 사진을 찍은 이의 입장을 철저하게 배제하며 사진에 대해서만 집중한다. 현상학에서 말하는 에포케가 그의 눈을 통해 얼렁뚱땅 실현되는 것이다. 그러니깐 나폴레옹의 막냇동생 제롬의 사진을 보고서, “나는 황제를 보았던 두 눈을 보고 있다”는 놀라움을 마음껏 표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사진의 미덕이다. 그냥 관람자가 되는 수밖에 없다. 굳이 바르트의 용어를 빌리자면 ‘스투디움(studium)-나는 좋아한다’으로, 사진을 보는 것으로 충분히 즐거움을 가지는 것에 만족해야 한다. ‘푼크툼(punctum)-나는 사랑한다'에 현혹된다면 사진은 이제부터 부재하던 것이 편재되는 매개이다. 그 기억들. 내 정신을 헤집던 것들. 다시 움트는 상처로, 온통 푸른 멍으로 몸은 또다시 옹송크려질 것이다. 슬픈 영화를 볼 게 아니라 옛 앨범을 뒤적이면 된다는 말이다.</p>

<p>바르트의 시대는 갔고, 누구나 하나쯤 들고 다니는 카메라, 거기에 관련된 책이라면 실은 『밝은방』 같은 게 아니라, ‘포토샵 보정’에 같은 게 훨씬 유익할 것이다. 얼마 전 친구가 그러더라. “뽀샵이야말로 백익무해다.”라고. 사진첩을 정리하며 ‘어, 어, 이거 뭐지’하며 보고 또 봐도 기억이 안 난다면 역시 『밝은방』따위는 던져버리고 포토샵 관련 책을 보는 게 현명하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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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황금 노트북 / 도리스 레싱</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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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dified>2009-02-15T02:36:54Z</modified>
<issued>2007-10-11T22:44:23Z</iss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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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mmary type="text/plain">『황금 노트북』은 안나 울프(Anna Wulf)에 관한 이야기이자 동시에 안나가 쓰는 이야기이다. 소설은 주인공이자 작가이면서 동시에 서술자의 역할을 하는 안나 울프의 의식세계를 파헤치고 있다. 안나의 의식은 ‘검정 노트북’, ‘빨간 노트북’, ‘노란 노트북’, ‘파란 노트북’ 네 권의 노트북과 내부의 ‘황금 노트북’ 그리고 ‘자유로운 여자들’간의 시공간을 오가며 전개된다. 처음 네 권의 노트북은 서로 화해할 수 없는 안나의 여러 국면을 반영하고 있다. 검정 노트북은 젊은 날 작가로서 안나 울프의 성공을 비판적으로 보며, 백인 인종주의와 흑인 원주민의 갈등, 작가로서 안나와 한 개인이자 여성인 안나 사이의 갈등을 드러낸다. 검정 노트북이 끝날 때 안나는 이상주의적 열정으로 사회주의 이념과 정치활동에 참여하던 자신의 젊은 날에 수치심에 찬 냉소를 보낸다. “이건 향수로 가득 차있다. 단어마다 향수가 서려 있다. 쓸 때는 객관적이라고 생각했는데도 무엇에 대한 향수란 거지? 알 수 없다. 그것들 가운데 무엇이든 다시 경험하느니 차라리 죽고 싶을 뿐이다. 그때의 ‘안나’는 적, 아니면 너무나 잘 알아서 보고 싶지 않은 옛 친구와 같은데.” 공산당원으로서 정치적 경험을 기록한 빨간 노트북은 정치 참여에 대한 좌절과 실패를, 노란 노트북은 안나와 마이클의 연애와 결혼을 토대로 남녀관계의 갈등과 낭만적 사랑이 얼마나 허구적인가를 ‘제3의 그림자’라는 소설로 그려낸다. 파란 노트북은 안나의 일기로 구성되어 있다.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소설로 허구화 하는 것이 현실도피라 여긴 안나가 ‘일기’를 통해 현실을 객관적으로 재현하려고 시도한다. “나는 토미와 몰리가 다투는 곳에서 벗어나 2층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즉시 그 장면을 단편소설로 바꾸기 시작했다. 내가 이렇게 하는 것 -모든 것을 허구로 변형시키는 것- 은 일종의 도피임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왜 나는 결코 단순히 일어나는 일만을 기록하지 않는 걸까? 왜 일기를 쓰지 않는 거지? 내가 모든 것을 허구로 변화시키는 것은 나 자신으로부터 무엇인가를 감추려는 일종의 수단임이...</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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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ATA[<p>『황금 노트북』은 안나 울프(Anna Wulf)에 관한 이야기이자 동시에 안나가 쓰는 이야기이다. 소설은 주인공이자 작가이면서 동시에 서술자의 역할을 하는 안나 울프의 의식세계를 파헤치고 있다. 안나의 의식은 ‘검정 노트북’, ‘빨간 노트북’, ‘노란 노트북’, ‘파란 노트북’ 네 권의 노트북과 내부의 ‘황금 노트북’ 그리고 ‘자유로운 여자들’간의 시공간을 오가며 전개된다.</p>

<p>처음 네 권의 노트북은 서로 화해할 수 없는 안나의 여러 국면을 반영하고 있다. 검정 노트북은 젊은 날 작가로서 안나 울프의 성공을 비판적으로 보며, 백인 인종주의와 흑인 원주민의 갈등, 작가로서 안나와 한 개인이자 여성인 안나 사이의 갈등을 드러낸다. 검정 노트북이 끝날 때 안나는 이상주의적 열정으로 사회주의 이념과 정치활동에 참여하던 자신의 젊은 날에 수치심에 찬 냉소를 보낸다.   </p>

<div style="margin:10px; padding:10px; border: 1px dotted #ccc; color:  rgb(33, 85, 107); background: #efefef;">“이건 향수로 가득 차있다. 단어마다 향수가 서려 있다. 쓸 때는 객관적이라고 생각했는데도 무엇에 대한 향수란 거지? 알 수 없다. 그것들 가운데 무엇이든 다시 경험하느니 차라리 죽고 싶을 뿐이다. 그때의 ‘안나’는 적, 아니면 너무나 잘 알아서 보고 싶지 않은 옛 친구와 같은데.”</div>

<p>공산당원으로서 정치적 경험을 기록한 빨간 노트북은 정치 참여에 대한 좌절과 실패를, 노란 노트북은 안나와 마이클의 연애와 결혼을 토대로 남녀관계의 갈등과 낭만적 사랑이 얼마나 허구적인가를 ‘제3의 그림자’라는 소설로 그려낸다.</p>

<p>파란 노트북은 안나의 일기로 구성되어 있다.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소설로 허구화 하는 것이 현실도피라 여긴 안나가 ‘일기’를 통해 현실을 객관적으로 재현하려고 시도한다.</p>

<div style="margin:10px; padding:10px; border: 1px dotted #ccc; color:  rgb(33, 85, 107); background: #efefef;">“나는 토미와 몰리가 다투는 곳에서 벗어나 2층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즉시 그 장면을 단편소설로 바꾸기 시작했다. 내가 이렇게 하는 것 -모든 것을 허구로 변형시키는 것- 은 일종의 도피임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왜 나는 결코 단순히 일어나는 일만을 기록하지 않는 걸까? 왜 일기를 쓰지 않는 거지? 내가 모든 것을 허구로 변화시키는 것은 나 자신으로부터 무엇인가를 감추려는 일종의 수단임이 명백하다. (...) 이제부터는 일기를 쓸 테다.”</div>

<p>안나는 일기 속에서 오랫동안 자신이 주변에 의도적으로 방관해 왔거나 혹은 기억에서 억제해 왔던 경험의 조각들과 대면하기 시작한다.</p>

<p>네 권의 노트북들은 전부 사라지고 내부의 황금 노트북이 등장한다. 이 노트북은 파편화된 안나들 간에 내재하고 있던 긴장들을 해결하는 위치에 자리하면서 네 권의 노트북을 한 권으로 통합하고 있다.</p>

<p>또 다른 내부 소설로써 전체 소설을 감싸는 ‘자유로운 여성’에서 안나는 객관적인 서술자로 자신의 주변 이야기를 전개한다. 현재를 사는 안나는 삶의 진실이 상대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과거의 이상적인 안나와는 달리 더는 사람의 ‘유일한’ 진실을 찾으려고 애쓰지 않는다. 안나는 자신이 경험하는 세계를 직시하고 내부와 주변의 혼돈을 포용하며 이야기를 쓴다.</p>

<p>사회가 여성에게 부여하며 기대하는 역할 간의 갈등, 예술가로서 안나와 개인으로서 안나의 갈등, 이성과 감정의 괴리들로부터 안나가 획득하는 비전은 ‘인간의 의식과 이성으로 사회 이념과 신화, 가치체계가 분류되고 이름 붙여지고 테두리가 둘리기 이전의 상태’이다.</p>

<p>"지금 세계를 돌아보면 어디나 우리가 바라보는 구름처럼 변하지 않거나 해체되지 않는 생활 방식은 없다."라는 도리스 레싱의 말은 안나의 비전을 이어간다. 여성과 남성 등의 성별 구분으로 대변되는 ‘모든 이분법적 원리를 벗어나, 수직적인 위계질서가 아니라 수평적으로 공존하는 삶의 실체를 체험’하는 것이다.</p>

<div><a href="http://antimine.kr/pic/gnotebook1.jpg" onclick="return hs.expand(this)" title="황금노트북1" id="thumb1" class="highslide"><img width="200" src="http://antimine.kr/pic/gnotebook1.jpg" alt="새터" /></a><a href="http://antimine.kr/pic/gnotebook2.jpg" onclick="return hs.expand(this)" title="황금노트북2" id="thumb2" class="highslide"><img width="200" src="http://antimine.kr/pic/gnotebook2.jpg" alt="황금노트북2" /></a></div>

<p>도리스 레싱의 자전적 소설로 일컬어지는 『황금 노트북』은 1962년 출간된 후부터 많은 페미니스트들에게 ‘페미니스트 선언’으로 여겨졌다. 페미니스트들뿐만 아니라 비평가들의 평가 역시 매한가지였다. 그러나 도리스 레싱은 1973년 판 『황금 노트북』 서문에서 “이 소설은 여성해방을 위한 트럼펫이 아니다.”라며 이러한 논의를 일축한다.</p>

<div style="margin:10px; padding:10px; border: 1px dotted #ccc; color:  rgb(33, 85, 107); background: #efefef;">“『황금 노트북』이 수많은 여성적 감정들을 묘사하고 있지만 (......) 나는 이 책이 페미니즘 운동 이후 창조된 것처럼 보이는 여성의 태도들이 이미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것처럼 쓰고 있다. (......) 이 책의 핵심, 그것의 구조, 그 속에 포함된 모든 것을 이것저것으로 분리시키고 구분 지어서는 안 된다.”</div>

<p>『황금 노트북』은 1950년대 여성의 상황을 가장 정확하게 분석하고 있으며 레싱 역시 여성 권리를 명확하게 옹호하고 있다는 평이 지배적인데도, 서문을 들며 ‘작가는 페미니즘과 연계를 거부한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p>

<p>도리스 레싱은 당대 여성운동의 움직임과 그 과정 그리고 성과를 주시하고 있었고, 이 소설이 사회에 시사하는 바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서문을 통해 반대한 ‘분리’와 ‘구분’은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페미니즘 진영의 큰 축이었던 ‘급진주의 페미니즘’에 대한 경계로 해석될 수 있다.</p>

<p>급진주의 페미니즘은 ‘가부장제’뿐만 아니라 모든 남성이 여성을 억압함으로써 이익을 얻고 있으므로, 남성도 적으로 간주하며 여성만의 자율적인 여성운동이 필요하다고 봤다. 따라서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여성성을 적극적으로 찬미하며 어느 정도 분리주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자칫 여/남 구분에 따른 계층적이고 이중적인 사고방식으로 굳어질 수 있다는 지적을 받아왔다.</p>

<p>도리스 레싱은 『황금 노트북』이 여/남 간의 투쟁으로만 읽히는 것에 반대하며, 급진적 페미니즘이 국지적이라며 무조건 지지하기를 거부한다. 『황금 노트북』이 형식이나 주제에서 어느 하나의 의미로 고정할 수 없으며, 그러한 이유로 자신의 작품이 결코 ‘페미니스트 선언서’의 위치에 있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그는 소설에서 남녀의 문제뿐만 아니라 계급 간의 차별이나 인종차별 등을 아우르며 여성문제를 '분리된 여성의 문제'로 한정시키지 않고, '모든 억압받는 집단의 해방'이란 차원까지 확대한다. </p>

<p>찬드라 탈파드 모한티가 『경계 없는 페미니즘』에서 ‘다차원적이면서 동시에 편협함을 들어내는 경계들 간의 긴장에 주목하여, 우리 일상생활의 경계들을 통과하며, 경계들과 더불어 그리고 경계들을 극복하는 해방의 잠재력을 지닌 페미니즘’을 말할 때, 도리스 레싱이야말로 '경계 없는' 페미니즘에 가장 잘 들어맞는 작가 중 하나일 것이다.<br />
</p>]]>

</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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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아홉 생명 / 어슐러 르 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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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dified>2009-02-15T02:38:38Z</modified>
<issued>2007-09-27T22:55:36Z</issued>
<id>tag:antimine.kr,2007://1.659</id>
<created>2007-09-27T22:55:36Z</created>
<summary type="text/plain"> 『바람의 열두 방향』에 실린 단편 ‘겨울의 왕’은 『어둠의 왼손』의 시발점이 되는 작품이다. 어슐러 르귄은 『어둠의 왼손』에서 게센인-양성인간을 시종일관 남성형(he)으로 씀으로써 많은 페미니스트의 비판을 받았다. 이후에 어슐러 르귄은 『바람의 열두 방향』에서 ‘겨울의 왕’을 개정하고, he로 표기됐던 양성인간-게센인을 칭하는 보통명사를 모두 she로 바꾼다. he가 she로 변하면서 어떤 아이의 아버지는 she가 되는 식으로, 여/남이라는 이분은 뿌리째 뒤흔들린다. 어슐러 르귄은 『어둠의 왼손』 서문에서 SF는 미래를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할 뿐이라고 말한다. 그 소설가들의 임무는 상상력이 현 세계에 갇히지 않도록 미래를 재현하고, 이를 통해 ‘이 세계의 진리’를 드러내는 하나의 메타포를 제시하는 것이다. 어슐러 르귄이 “모든 허구는 은유이다”라고 할 때 그것은 현재 그리고 미래 세계에 대한 은유이다. 그가 ‘겐리 아이’의 입을 빌려 말하듯 “진실은 어떻게 상상하느냐에 따라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어둠의 왼손』의 큰 줄기는 우주연합 ‘에큐멘’에서 파견된 ‘겐리 아이’와 게센 행성의 ‘에스트라벤’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모든 게센인과 마찬가지로 에스트라벤 역시 남성(he) 이며 또한 여성(she)이고, 또는 어느 쪽도 아니다. 게센인들은 한 달 중 대부분 시간을 성적으로 중성 상태에 있다가 단 며칠만 ‘케머’라는 왕성한 성적 발정기를 겪는다. 케머 초기의 상태에 있는 두 게센인은 하나는 여성으로 다른 하나는 남성이 되어 성 관계를 갖고, 각자 중성으로 되돌아온다. 다음 달에는 남성, 여성의 역할이 바뀌게 될 수도 있다. 따라서 각 게센인은 아버지가 되기도 하고 어머니가 되기도 한다. 게센 행성에서 고정화된 성행위는 부적절할 뿐만 아니라, 불가능하다. 에큐멘의 사절인 겐리 아이는 게센 행성에선 외계인일 따름이다. 지구인인 그는 항시 성행위를 할 수 있는 ‘케머’ 상태에 있는 성도착자이며, 게센인이 볼 때는 오직 하나의 성으로 고정된 불완전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지구인 겐리 아이는 아무리 애를 써도 인간을 여/남으로 구분하는 고정관념을 버리기가 어려웠고, 때문에 게센인의...</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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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ATA[<div style="padding-right:15px;padding-left:5px;float:left;padding-bottom:10px;padding-top:0px;"><a href="http://antimine.kr/pic/Ursula_K_Le_Guin_Photos_by_Dan_Tuffs.jpg" onclick="return hs.expand(this)" title="Ursula K. Le Guin Photos by Dan Tuffs" id="thumb1" class="highslide"><img width="200" src="http://antimine.kr/pic/Ursula_K_Le_Guin_Photos_by_Dan_Tuffs.jpg" alt="Ursula K. Le Guin Photos by Dan Tuffs" /></a></div>
『바람의 열두 방향』에 실린 단편 ‘겨울의 왕’은 『어둠의 왼손』의 시발점이 되는 작품이다. 어슐러 르귄은 『어둠의 왼손』에서 게센인-양성인간을 시종일관 남성형(he)으로 씀으로써 많은 페미니스트의 비판을 받았다. 이후에 어슐러 르귄은 『바람의 열두 방향』에서 ‘겨울의 왕’을 개정하고, he로 표기됐던 양성인간-게센인을 칭하는 보통명사를 모두 she로 바꾼다. he가 she로 변하면서 어떤 아이의 아버지는 she가 되는 식으로, 여/남이라는 이분은 뿌리째 뒤흔들린다.  

<p>어슐러 르귄은 『어둠의 왼손』 서문에서 SF는 미래를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할 뿐이라고 말한다. 그 소설가들의 임무는 상상력이 현 세계에 갇히지 않도록 미래를 재현하고, 이를 통해 ‘이 세계의 진리’를 드러내는 하나의 메타포를 제시하는 것이다. 어슐러 르귄이 “모든 허구는 은유이다”라고 할 때 그것은 현재 그리고 미래 세계에 대한 은유이다. 그가 ‘겐리 아이’의 입을 빌려 말하듯 “진실은 어떻게 상상하느냐에 따라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p>

<p>『어둠의 왼손』의 큰 줄기는 우주연합 ‘에큐멘’에서 파견된 ‘겐리 아이’와 게센 행성의 ‘에스트라벤’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다.</p>

<p>모든 게센인과 마찬가지로 에스트라벤 역시 남성(he) 이며 또한 여성(she)이고, 또는 어느 쪽도 아니다. 게센인들은 한 달 중 대부분 시간을 성적으로 중성 상태에 있다가 단 며칠만 ‘케머’라는 왕성한 성적 발정기를 겪는다. 케머 초기의 상태에 있는 두 게센인은 하나는 여성으로 다른 하나는 남성이 되어 성 관계를 갖고, 각자 중성으로 되돌아온다.</p>

<p>다음 달에는 남성, 여성의 역할이 바뀌게 될 수도 있다. 따라서 각 게센인은 아버지가 되기도 하고 어머니가 되기도 한다. 게센 행성에서 고정화된 성행위는 부적절할 뿐만 아니라, 불가능하다. </p>

<p>에큐멘의 사절인 겐리 아이는 게센 행성에선 외계인일 따름이다. 지구인인 그는 항시 성행위를 할 수 있는 ‘케머’ 상태에 있는 성도착자이며, 게센인이 볼 때는 오직 하나의 성으로 고정된 불완전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p>

<p>지구인 겐리 아이는 아무리 애를 써도 인간을 여/남으로 구분하는 고정관념을 버리기가 어려웠고, 때문에 게센인의 본성과는 전혀 상관없는 테두리에 그들을 끼워 맞추는 실수를 하곤 한다.</p>

<p>제1차 에큐멘 조사원 보고서는 겐리 아이 같은 사절단을 위해 충고를 남겨 놓는다.</p>

<div style="margin:10px; padding:10px; border: 1px dotted #ccc; color:  rgb(33, 85, 107); background: #efefef;">“여러분이 게센인을 만난다면 남자와 여자가 있는 양성사회에서 하듯 행동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같은 성 또는 반대 성 사이의 양식화 된 즉 남녀 간의 상호작용을 기대하고 그들에게 남자 또는 여자의 역할에 상응하는 행동을 강요하는 것이다. 우리의 사회적•성적 상호작용이 보여 주는 그러한 양상은 이곳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타인을 남자와 여자로 보지 않는다. 사실 우리의 상상력으로 이것을 받아들이기란 힘든 일이다. 새로 태어난 아이를 봤을 때, 우리가 던지는 최초의 질문은 무엇인가?”</div>

<p>게센 행성은 태어난 아이를 두고 ‘남자야? 여자야?’ 같은 질문이 아예 성립될 수 없는 사회이다. 어슐러 르귄은 인간의 성별화 변용을 통해 사회구조와 개개인들이 그들의 많은 부분을 성별 구분을 통한 분류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보인다. 그것은 소설이 발표될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도 한몫하지만, 더불어 이러한 문제의식은 소설이 발표된 지 40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유효하다.</p>

<p>에큐멘 조사단원의 보고는 계속된다.</p>

<div style="margin:10px; padding:10px; border: 1px dotted #ccc; color:  rgb(33, 85, 107); background: #efefef;">“행성 겨울에 오게 될 선발대원이 아주 침착하거나 나이 든 사람이 아닐 때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기 쉬우므로 특히 주의해야 한다. 남자는 으레 그의 남성다움을 과시하고 싶어 하고 여자는 그의 여성다움이 존중되기를 바란다. 그것도 간접적으로 우아하게 요구할 것이다. 그러나 겨울 행성에서 그러한 것은 통하지 않는다. 각자는 오직 하나의 인간이라는 존재로서만 존중되고 판단될 뿐이다. 그것은 사실 소름끼치는 경험이다.”</div>
 
어슐러 르귄은 겐리 아이와 에스트라벤를 통해서 상대방을 성에 상관없이 한 인간인 존재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div style="padding-right: 5px; padding-left: 15px; float: right; padding-bottom: 10px; padding-top: 0px"><a href="http://antimine.kr/pic/the_winds_twelve_quarters.jpg" onclick="return hs.expand(this)" title="바람의 열두 방향" id="thumb2" class="highslide"><img width="200" src="http://antimine.kr/pic/the_winds_twelve_quarters.jpg" alt="바람의 열두 방향" /></a></div>

<p><strong>『바람의 열두 방향』 -아홉 생명</strong></p>

<p>「아홉 생명」은 인간 복제를 다룬다. ‘마틴’과 ‘퓨’는 ‘라이브라’ 행성 실험 기지에 파견되어 있다. 그 둘의 임무를 지원하고자 ‘10클론’이라는 한 사람의 창자 세포로부터 만들어진 10명의 복제인간이 기지를 방문한다. 남자 다섯과 여자 다섯으로 구성된 복제 인간은 동일한 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때론 그들 모두가 한 사람처럼 여겨지기도 한다.</p>

<p>‘퓨’가 10클론 중 한 쌍의 남녀가 섹스하는 것을 보고 근친상간인지 자위인지 모르겠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이들은 각자가 개별적 인간이기도 하지만 하나의 머리와 10개의 몸을 가진 인간들이기도 하다. 이러한 클론의 특성으로 그들은 주어진 작업을 대단히 효율적으로 해내지만, 결국 사고로 아홉의 클론은 죽고 ‘카프’만이 남게 된다. 살아남은 카프는 생애 처음으로 ‘다중 자아’를 벗어나 ‘한 인간’으로서 외로움과 두려움을 느끼게 되고 서서히 자기 자신, 즉 인간에 대해 성찰을 하게 된다.</p>

<p>「아홉 생명」 1968년 「플레이보이」에 처음 실렸는데, 어슐러 르귄이 보낸 원본 원고에서 ‘사소한’ 부분이 바뀌어 출간되었다. 필명 또한 ‘어슐러 K. 르귄’이 아니라 ‘U. K. 르귄’으로 표기됐다. 어슐러 르귄은 이에 대해 “편집자나 출판업자가 자신을 ‘여류 문필가’로 취급하며 성적 편견을 보였던 생애 최초이자 유일한 경우였다”라고 말한다. 비록 「플레이보이」를 통해 SF가 대중적으로 크게 전파되는 계기가 됐지만 그들의 수준은 소설에 한참 못 미치는 것이었다.</p>

<p>「플레이보이」가 바꿨다는 ‘사소한’ 부분은 ‘마틴’과 ‘퓨’ 두 남성에 관한 부분이다. 어슐러 르귄은 이들의 관계를 동성애로 나타내지만, 플레이보이는 이를 흡사 우정으로 보이게끔 하고 있다. 살아남은 카프가 퓨에게 던진 “마틴을 사랑하나요?”라는 질문을 「플레이보이」는 “마틴을 좋아하나요?”라고 바꾸어 놓았고, 퓨의 “그래, 사랑해”라는 대답을 삭제했다. </p>

<p>어술러 르귄은 퓨의 “... 우린 서로 외로웠어. 어둠 속에서 손을 내미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겠지?”라는 말에서 동성애를 ‘인간’ 사이의 자연스러운 성애로 묘사한다. </p>

<p><br />
어슐러 르귄의 SF는 과학적 엄밀성을 넘어, 곳곳에서 드러나는 페미니즘과 동성애, 아나키즘의 요소를 통해 독자에게 ‘상상하라’고 “진실이란 상상하기 나름”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 상상이야말로 우리가 당연하다고 믿어 왔던 세계에 균열을 가하고, 그 틈으로부터 새로운 사고와 직관을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뜬금없지만, <a href="http://equotes.wetpaint.com/page/Tupac+Shakur?t=anon">투팍 샤커</a>의 말처럼 “현실은 진실이 아니다. 꿈이 진짜 현실이다. Reality is wrong. Dreams are for real.”--></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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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소돔 120일의 구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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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dified>2009-02-15T02:48:33Z</modified>
<issued>2007-05-29T15:03:17Z</issued>
<id>tag:antimine.kr,2007://1.631</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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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mmary type="text/plain">책의 내용이 무엇보다 중요하겠지만 그 주변의 이야기를 양념으로 얹는다면 더 흥미진진해지기도 하다. 얼마 전 누군가 사드의 『Histoire de Juliette, ou les prospérités du vice 쥘리에트 이야기, 또는 악덕의 번영』을 빌려 달라고 해서 오만 책장을 다 뒤졌지만 찾을 수 없었다. 『Justine ou Les malheurs de la vertu 쥐스틴느, 또는 미덕의 불행』을 잘못 생각해서 가지고 있다고 한 것인지 어쩐지 도통 모르겠다. 여하튼 찾아볼 만큼 찾아봤고 없다는 결론을 냈다. 사드의 번역서는 미덕의 불운이 번역된 적이 있고(『미덕의 불운』과 『쥐스틴느 또는 미덕의 불행』은 다른 책이다.) 과연 사드의 작품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성처녀의 욕망』이 ‘사드의 욕망’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됐다. 외에 한 챕터를 빼먹었던 『안방철학』과 그 완역본인 『규방철학』, 그리고 워낙 유명해서 읽지 않고서도 이바구 까는 『소돔120일』 등이 있다. (『신부님의 금지된 장난』도 있다.) 소돔 120일을 한 호흡에 다 읽었다는 사람을 만나면 입에 침을 잔뜩 바르고 “우와 대단해요”라고 말해줄 것이다. 나는 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가 차라리 읽기 수월했다. 책도 겨우겨우 읽어 냈을 뿐더러, 몇 년 전 파졸리니 회고전에서는 영화를 보다가 푸욱 자고 말았다. 여하튼 소돔 120일에 대한 메타 텍스트는 넘치고 넘치니 그걸로 욕구를 채우시고 단지 무늬에 대한 얘기를 할 생각이다. 새터에서 번역 초판이 출간된 게 어언 16년 전이고 바로 판금 됐다. 후에 고도출판사에서 새롭게 나온 게 2000년이다. 이쯤에서 내가 번역자나 출판사를 씹는다 한들 판매에 영향을 줄 것도 아니요 망해버린 출판사를 욕 먹이는 일도 아닐 것이라는 생각으로 끼적인다. 이 우스개의 핵심은 출간 당시 동아일보 기사부터 시작해야 한다. 동아일보 말고 한겨레에서도 똑같이 다뤘던 기억이 있다. 살펴보면 기자가 사실 확인을 안 하고 쓴 것이니 기사 자체가 소설일 수도 있다. [동아일보 문화]-[새책] &quot;내이름을 책에서 빼주오&quot; `소돔 120일` 번역자 통사정 “내가 번역자임을 알리지 말라”....</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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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ATA[<p>책의 내용이 무엇보다 중요하겠지만 그 주변의 이야기를 양념으로 얹는다면 더 흥미진진해지기도 하다. 얼마 전 누군가 사드의 『Histoire de Juliette, ou les prospérités du vice 쥘리에트 이야기, 또는 악덕의 번영』을 빌려 달라고 해서 오만 책장을 다 뒤졌지만 찾을 수 없었다. 『Justine ou Les malheurs de la vertu 쥐스틴느, 또는 미덕의 불행』을 잘못 생각해서 가지고 있다고 한 것인지 어쩐지 도통 모르겠다. 여하튼 찾아볼 만큼 찾아봤고 없다는 결론을 냈다. 사드의 번역서는 미덕의 불운이 번역된 적이 있고(『미덕의 불운』과 『쥐스틴느 또는 미덕의 불행』은 다른 책이다.) 과연 사드의 작품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성처녀의 욕망』이 ‘사드의 욕망’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됐다. 외에 한 챕터를 빼먹었던 『안방철학』과 그 완역본인 『규방철학』, 그리고 워낙 유명해서 읽지 않고서도 이바구 까는 『소돔120일』 등이 있다.  (『신부님의 금지된 장난』도 있다.)</p>  
<p>
소돔 120일을 한 호흡에 다 읽었다는 사람을 만나면 입에 침을 잔뜩 바르고 “우와 대단해요”라고 말해줄 것이다. 나는 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가 차라리 읽기 수월했다. 책도 겨우겨우 읽어 냈을 뿐더러, 몇 년 전 파졸리니 회고전에서는 영화를 보다가 푸욱 자고 말았다. 여하튼 소돔 120일에 대한 메타 텍스트는 넘치고 넘치니 그걸로 욕구를 채우시고 단지 무늬에 대한 얘기를 할 생각이다.</p>
<div><a href="http://antimine.kr/pic/sade3.jpg" onclick="return hs.expand(this)" title="새터" id="thumb1" class="highslide"><img width="200" src="http://antimine.kr/pic/sade3.jpg" alt="새터" /></a><a href="http://antimine.kr/pic/sade1.jpg" onclick="return hs.expand(this)" title="고도" id="thumb2" class="highslide"><img width="200" src="http://antimine.kr/pic/sade1.jpg" alt="고도" /></a></div>
<p>
새터에서 번역 초판이 출간된 게 어언 16년 전이고 바로 판금 됐다. 후에 고도출판사에서 새롭게 나온 게 2000년이다. 이쯤에서 내가 번역자나 출판사를 씹는다 한들 판매에 영향을 줄 것도 아니요 망해버린 출판사를 욕 먹이는 일도 아닐 것이라는 생각으로 끼적인다. 이 우스개의 핵심은 출간 당시 동아일보 기사부터 시작해야 한다. 동아일보 말고 한겨레에서도 똑같이 다뤘던 기억이 있다. 살펴보면 기자가 사실 확인을 안 하고 쓴 것이니 기사 자체가 소설일 수도 있다.</p>       

<div style="margin:10px; padding:10px; border: 1px dotted #ccc; color:  rgb(33, 85, 107); background: #efefef;"> 
<p>[동아일보 문화]-[새책] "내이름을 책에서 빼주오" `소돔 120일` 번역자 통사정</p>   
<p>“내가 번역자임을 알리지 말라”.</p> 
<p>‘사디즘(Sadism)’의 어원이 된 사드 후작(1740∼1814)의 대표작 [소돔 120일]이 최근 재출간됐다. 한가지 이상한 점은 책 어디에서도 번역자 이름을 찾을 수 없다는 것. 일본 번역물을 마구잡이로 중역한 해적판일까.</p>
<p>고도 출판사 이춘화 대표는 ‘천부당 만부당’이라며 펄쩍 뛴다. “프랑스 고전총서를 모본으로 전문번역가가 1년 넘게 공들여 번역한 정품”이라는 것이다.</p> 
<p>그러면서도 번역자의 신상에 대해서는 “유명대 불문과 박사과정을 마쳤다”는 말외에는 구체적인 언급을 회피했다. “이름이나 신분을 밝히지 말아달라는 당사자의 뜻이 워낙 강력해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담당 편집자는 “부모가 이 책을 번역했다는 것을 자식이 몰랐으면 한다고 통사정했다”고 귀뜸했다.</p> 
<p>번역가조차 몸을 사릴 정도니 [소돔 120일]이 우리사회에서 아직도 ‘뜨거운 감자’임은 틀림없어 보인다. 92년 새터 출판사에서 ‘용감하게’ 번역서를 냈을 때도 청소년보호단체 등 시민단체의 강력한 항의를 받아 초판 이상을 찍지 못했다.</p> 
<p>하지만 사드의 작품에 대한 문학계의 시각은 ‘도착적인 에로티즘’ 이상이다. 이 책은 ‘이성 우월주의가 횡행하던 18세기에 서양의 합리주의를 전복시킨 저항문학’으로 평가받아왔다. </p>
<p>조르쥬 바타이유의 명저인 '에로티즘' 같은 저서는 이 소설의 철학 버전과도 같다. 새터 출판사 서필봉 대표는 “지금도 문학 전공자들이 책을 살 수 없느냐, 복사라도 할 수 없겠냐는 문의 전화가 일주일에 3∼4통씩 올 정도”라고 말한다. </p>
<p>고도 출판사는 전공자를 겨냥해 책을 펴냈지만 내심 걱정하는 눈치다. ‘안전판’으로 표지에는 포르노물에나 등장하는 ‘19세 미만 구독불가’라는 문구를 넣고 비닐랩으로 밀봉하는 성의를 보였다.</p> 
<p>혹시 언론의 오해를 받을까봐 보도자료 만드는 솜씨가 탁월하다는 모 출판사에 편집자를 보내 홍보물 문구까지 감수(?) 받았을 정도.</p> 
<p>이 대표는 “사회 분위기가 바뀌어서 간행물윤리위원회에서도 별 문제를 삼지 않을 것으로 본다”면서도 “행여나 과도한 여론의 관심을 받을까봐 걱정이다”고 속내를 털어놨다.(문화 윤정훈기자) 2000년 09월 01일</p>
</div>
<p>인간들의 구라는 뻔뻔하기도 하지. 10년 전 책을 토씨 몇 개 바꿔서 낸 게 다면서. 번역뿐만 아니라 역자의 앞머리도 똑같다. 고도 출판사와 새터 출판사의 앞 장 번역 비교이다.</p> 
<div><a href="http://antimine.kr/pic/sade4.jpg" onclick="return hs.expand(this)" title="새터 역자 서문" id="thumb3" class="highslide"><img width="120" src="http://antimine.kr/pic/sade4.jpg" alt="새터 역자 서문" /></a><a href="http://antimine.kr/pic/sade5.jpg" onclick="return hs.expand(this)" title="고도 역자 서문" id="thumb4" class="highslide"><img width="120" src="http://antimine.kr/pic/sade5.jpg" alt="고도 역자 서문" /></a><a href="http://antimine.kr/pic/sade6.jpg" onclick="return hs.expand(this)" title="새터서설" id="thumb5" class="highslide"><img width="120" src="http://antimine.kr/pic/sade6.jpg" alt="새터 서설" /></a><a href="http://antimine.kr/pic/sade7.jpg" onclick="return hs.expand(this)" title="고도 서설" id="thumb6" class="highslide"><img width="120" src="http://antimine.kr/pic/sade7.jpg" alt="고도 서설" /></a></div>
<p>새터의 번역자는 황수원. 심효림 옮김으로 돼 있고(심효림은 『사드 신화와 반신화』를 번역하기도 했다.) 고도의 번역자는 밝혀지지 않았다. </p> 
<p>물론 정말로 새로운 번역자인데 그 새로운 번역자가 아이들 보기 낯깎여서가 아니라, 이전 번역을 그대로 베낀 게 낯깎여서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설마? ㅋ 어찌 됐든 이 정도면 사기지.</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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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세계여성소설걸작선</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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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dified>2009-02-15T03:10:36Z</modified>
<issued>2006-11-12T09:08:23Z</issued>
<id>tag:antimine.kr,2006://1.660</id>
<created>2006-11-12T09:08:23Z</created>
<summary type="text/plain">여성해방운동의 성서로 불렸던 『여성과 노동』의 작가 올리브 슈라이너(1855~1920)는 “나는 너무도 지쳐 있고, 미래가 오기도 전에 미래에도 지쳐 있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 말에 한번이라도 고개가 끄덕여졌다면,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위안이다. 그가 21세기를 살았더라도 저 마음이 바뀌었을까 싶지만, 그렇다고 미래를 디스토피아로만 단정 짓고 미리부터 끔찍해 할 필요는 없다. 사변소설(Speculative Fiction)은 SF(Science Fiction)가 지향하는 과학적 엄밀성보다는 새로운 상상력과 실험을 통해 현 사회와 인간을 되돌아보는 데 방점을 둔다. 실제로 SpeculativeFiction가 보여주는 유토피아에 꼭 다다르지 않더라도, 거기에는 새로운 말과 새로운 세계가 있고, 그것이 때로 위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SF는 아직 오지 않은, 혹은 발견되지 않은 세계를 근간으로 한다. 거기에는 우리가 놓친 세계에서 &quot;발견되지 않은 말&quot;이 있다. 이 말을 만드는 작업에 페미니스트 작가들이 참여하게 되면서 시간적, 공간적, 생물학적 한계를 뛰어넘는 상상력이 새로운 언어로 펼쳐진다. 이 말은 기존 언어 체계에 갇혀 있던 상상력을 한 차원 더 끌어올린다. SF의 황금시대라고 불리는 1940년대와 1950년대를 거치고, 1960년대 뉴 웨이브와 함께 좌파 남성 작가들의 활동이 두드러지면서 인종과 계급, 반전을 다루는 작품이 늘었지만 그 안에서 여성의 위치는 여전히 종속적이었다. 그 남성 작가들의 세계관을 통해 여성과 젠더가 드러나는 방식은 사회의 시선과 일반 남성에게 내재된 것과 그닥 다르지 않았다. 1960년대 이후 &apos;뉴 웨이브&apos;의 기치를 두고 &apos;페미니즘SF&apos;라는 새로운 조류가 형성되었다. 넓은 의미에서 보자면 &apos;뉴 웨이브&apos;는 SF에서 드러나는 테크놀로지의 상상력만큼, 모험적이고 진보적인 언어와 사회적 관점을 찾으려는 시도였다. 이것이 페미니즘과 엮이면서 소설의 언어나 서술 상의 변화를 통해 정치와 생활양식에 대한 급진적인 양태를 드러내는 작품들이 서서히 발표됐다. 페미니즘 SF 작가들은 고전적 소재였던 시간여행, 우주, 사이버 펑크 등에서 벗어나 새롭고 실험적인 주제를 도입했다. 그들은 무엇보다 기존 세계의 바탕을 이루고 있던 이분법적인 성별 구조와 성차를 규정짓는 방식에 균열을 가한다....</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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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antimine</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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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ail>antimine.kr@gmail.com</ema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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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subject>Ennui</dc:subj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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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ATA[<p>여성해방운동의 성서로 불렸던 『여성과 노동』의 작가 올리브 슈라이너(1855~1920)는 “나는 너무도 지쳐 있고, 미래가 오기도 전에 미래에도 지쳐 있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 말에 한번이라도 고개가 끄덕여졌다면,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위안이다. 그가 21세기를 살았더라도 저 마음이 바뀌었을까 싶지만, 그렇다고 미래를 디스토피아로만 단정 짓고 미리부터 끔찍해 할 필요는 없다.</p>

<p>사변소설(Speculative Fiction)은 SF(Science Fiction)가 지향하는 과학적 엄밀성보다는 새로운 상상력과 실험을 통해 현 사회와 인간을 되돌아보는 데 방점을 둔다. 실제로 <strong>S</strong>peculative<strong>F</strong>iction가 보여주는 유토피아에 꼭 다다르지 않더라도, 거기에는 새로운 말과 새로운 세계가 있고, 그것이 때로 위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p>

<p>SF는 아직 오지 않은, 혹은 발견되지 않은 세계를 근간으로 한다. 거기에는 우리가 놓친 세계에서 "발견되지 않은 말"이 있다. 이 말을 만드는 작업에 페미니스트 작가들이 참여하게 되면서 시간적, 공간적, 생물학적 한계를 뛰어넘는 상상력이 새로운 언어로 펼쳐진다. 이 말은 기존 언어 체계에 갇혀 있던 상상력을 한 차원 더 끌어올린다.</p>

<p>SF의 황금시대라고 불리는 1940년대와 1950년대를 거치고, 1960년대 뉴 웨이브와 함께 좌파 남성 작가들의 활동이 두드러지면서 인종과 계급, 반전을 다루는 작품이 늘었지만 그 안에서 여성의 위치는 여전히 종속적이었다. 그 남성 작가들의 세계관을 통해 여성과 젠더가 드러나는 방식은 사회의 시선과 일반 남성에게 내재된 것과 그닥 다르지 않았다.</p>

<p>1960년대 이후 '뉴 웨이브'의 기치를 두고 '페미니즘SF'라는 새로운 조류가 형성되었다. 넓은 의미에서 보자면 '뉴 웨이브'는 SF에서 드러나는 테크놀로지의 상상력만큼, 모험적이고 진보적인 언어와 사회적 관점을 찾으려는 시도였다. 이것이 페미니즘과 엮이면서 소설의 언어나 서술 상의 변화를 통해 정치와 생활양식에 대한 급진적인 양태를 드러내는 작품들이 서서히 발표됐다. </p>

<p>페미니즘 SF 작가들은 고전적 소재였던 시간여행, 우주, 사이버 펑크 등에서 벗어나 새롭고 실험적인 주제를 도입했다. 그들은 무엇보다 기존 세계의 바탕을 이루고 있던 이분법적인 성별 구조와 성차를 규정짓는 방식에 균열을 가한다. </p>

<div style="padding-right:15px;padding-left:5px;float:left;padding-bottom:10px;padding-top:0px;"><img src="http://antimine.kr/pic/pictbook1.jpg" height="295" width="200" alt="image" /></div>
조안나 러스의 말마따나, 'SF의 세계에서는 고정된 남녀 역할에 따라 스토리가 전개될 필요가 없'었다. 페미니즘 SF 작가들은 여성/남성이라는 이분법을 뒤엎은 세계를 보여줌으로써, 사회구조 속에 미묘하게 녹아 쉽게 드러나지 않았던 여성문제를 구호와 선언을 뛰어넘어 현 세계에 대한 은유로 제시했다. 

<p>페미니즘과 SF의 매혹적인 조합에 빠져들고자 한다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1994년 여성사에서 출간된 『세계여성소설걸작선』은 비록 SF라는 말은 빠져있지만, 훌륭한 페미니즘 SF의 길잡이다. 15편의 중단편으로 이루어진 이 선집은 '뭘 읽어야 성에 차지?' 하고 갈증에 탔던 이들에게 하나의 이정표를 제시할 것이다. 달근달근하며 서서히 아드레날린이 몸을 휘젓고 다니는 것을 느끼게 되는 소설들로 꽉 차있어, 어느 하나 버릴 수 없이 술술 넘게 한다. 뿐만 아니라, 늘 페미니즘 관련 서적에 오르내리던 조안나 러스나 『페미니즘 사전』으로 잘 알려진 리사 터틀의 단편들을 만날 수도 있다.</p>

<p>리사 터틀의 「남자의 여자」(The Wound)나 조안나 러스의 「그들이 돌아온다 해도」(When It Changed), 존 발리의 「레오와 클레오」(Options),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휴스턴, 휴스턴, 들리는가?」(Houston, Houston, Do you Read?)등은 남녀 이외의 성별이 존재하는 사회, 생물학적 성징이 없던 인간이 특별한 계기로 성이 분화되는 사회, 한 가지 성만 남은 사회에 다른 성이 나타난다거나, 성전환이 손바닥 뒤집기보다 쉬운 사회 등을 다루었다. 그 과정에서 현실 사회의 차별적인 성역할 분담이나 그 속에 숨어있는 가치관이 실제로 얼마나 왜곡된 것인지 여실히 드러낸다. 페미니즘 SF는 성별 구획에 갇혀 살아가던 사회의 젠더 구조를 흐트러뜨리며, 전혀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점친다.</p>

<div style="padding-right:15px;padding-left:5px;float:right;padding-bottom:10px;padding-top:0px;"><img src="http://antimine.kr/pic/pictbook2.jpg" height="295" width="200" alt="image" /></div>
특히 조안나 러스의 「그들이 돌아온다 해도」는 출간 당시 엄청난 논쟁에 휘말렸다. 최소 8백 년 동안 남성이라고는 없었던 '와일어웨이'(Whileaway), 천 년 후의 지구를 무대로 하는 소설은 그 세계에 “그들이 돌아왔어요! 진짜 지구 남자들이요!”라는 외침과 함께 남성들이 들이닥쳤을 때의 상황을 묘사한다. 「그들이 돌아온다 해도」를 적나라하게 파헤치자면, 1970년대 페미니스트들이 이야기하던 '여성들의 사회적 여건을 개선하라'는 주장들로 가득하다.

<p>이런 이유로 당시 조안나 러스의 작품을 실어 주는 출판사는 어디에도 없었다. 갈 곳을 못 찾던 「그들이 돌아온다 해도」는 후에 SF 역사상 가장 큰 획으로 일컬어지는 할란 엘리슨(Harlan Ellison)의 앤솔러지 『다시, 위험한 상상력』(Again, Dangerous Visions 1972)에 실리게 된다. 그 직후 SF에서 휴고상과 더불어 가장 권위 있는 네뷸러 상을 받는다. '와일어웨이'는 1975년 페미니즘 SF의 고전으로 일컬어지는 『피메일 맨』(The Female Man)으로 이어진다.</p>

<p>극으로 치달은 가정폭력을 다루는 팻 머피의 「식물 아내」(His Vegetable Wife)와 「나뭇잎 사이의 여인들」(Women in the trees) 그리고 코니 윌리스의 「섹스 또는 배설」(All My Darling Daughters), 수젯 헤이든 엘긴의 「그레이스 고모를 위하여」(For the Sake of Grace) 등은 SF만의 형식으로 암울한 디스토피아를 그려낸다.</p>

<p>행여나 끌어온 미래마저 우울해진다면, 이 책의 마지막을 어슐러 k 르귄의 「정복하지 않은 사람들」(Sur)로 마무리 짓기 바란다. 딱 그만큼의 관용으로 남성들의 세계를 내려보며 '애쓴다'라고 한마디 되뇌면 충분한 위로가 될 것이다. 외에도 15편의 페미니즘 SF가 보이는 세계는 우리가 맞닥뜨린 세계를 조롱하고, 분노하고, 때론 헤집으며 '여성의 이미지'를 다시 읽을 수 있는 기폭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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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화성 연대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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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d>2006-01-16T04:05:19Z</iss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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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mmary type="text/plain"><![CDATA[미래를 향해 노스탤지어를 느낄 수 있을까? 그것이 설사 디스토피아 일지라도 말이다. 『화성 연대기』를 읽어가는 것은 미래를 찾아가는 것이고 과학이 골렘으로 변한 날들과 대면하게 되는 과정이다. 미래가 암암한 과거의 기억처럼 오다 어느 순간에 아긋한 조각들이 맞춰지고 진심으로 나는 화성인이 되는 것이다. &quot;They knew how to live with nature and get along with nature. They didn't try too hard to be all men and no animal. That's the mistake we made when Darwin showed up. We embraced him and Huxley and Freud, all smiles. And then we discovered that Darwin and our religions didn't mix. Or at least we didn't think they did. We were fools. We tried to budge Darwin and Huxley and Freud. They wouldn't move very well. So like idiots, we tried knocking down religion. We succeeded pretty well. We lose our faith and went around wondering what life was for. If art was no more than a frustrated outflinging of desire, if religion was no more than self-delusion, what good was life? Faith had always given us answers to all things. But it all went down the drain with Freud and Darwin. We were and still are a lost people.&quot; &quot;그들은 자연과 함께, 자연과 어울려 사는 방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지나치게 강조하려고 하지 않았지요. 바로 그 점이야말로 다윈이 나타난 뒤로 우리가 저지른 크나큰 잘못입니다. 우리는 웃는 얼굴로 다윈과 헉슬리와 프로이트를 환영했습니다. 그리고 다윈과 우리가 가진 종교가 잘 어울리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차렸지요. 아니, 적어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바보였습니다. 우리는 다윈과 헉슬리와 프로이트를 무너뜨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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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ATA[<p>미래를 향해 노스탤지어를 느낄 수 있을까? 그것이 설사 디스토피아 일지라도 말이다. 『화성 연대기』를 읽어가는 것은 미래를 찾아가는 것이고 과학이 골렘으로 변한 날들과 대면하게 되는 과정이다. 미래가 암암한 과거의 기억처럼 오다 어느 순간에 아긋한 조각들이 맞춰지고 진심으로 나는 화성인이 되는 것이다. </p>
<div style="padding: 5px 15px; color: rgb(0, 0, 128); text-align: justify;">&quot;They knew how to live with nature and get along with nature. They didn't try too hard to be all men and no animal. That's the mistake we made when Darwin showed up. We embraced him and Huxley and Freud, all smiles. And then we discovered that Darwin and our religions didn't mix. Or at least we didn't think they did. We were fools. We tried to budge Darwin and Huxley and Freud. They wouldn't move very well. So like idiots, we tried knocking down religion. We succeeded pretty well. We lose our faith and went around wondering what life was for. If art was no more than a frustrated outflinging of desire, if religion was no more than self-delusion, what good was life? Faith had always given us answers to all things. But it all went down the drain with Freud and Darwin. We were and still are a lost people.&quot; <br />
<br />
&quot;그들은 자연과 함께, 자연과 어울려 사는 방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지나치게 강조하려고 하지 않았지요. 바로 그 점이야말로 다윈이 나타난 뒤로 우리가 저지른 크나큰 잘못입니다. 우리는 웃는 얼굴로 다윈과 헉슬리와 프로이트를 환영했습니다. 그리고 다윈과 우리가 가진 종교가 잘 어울리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차렸지요. 아니, 적어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바보였습니다. 우리는 다윈과 헉슬리와 프로이트를 무너뜨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우리는 바보였기 때문에 우리의 종교를 쓰러뜨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 시도는 성공했습니다. 우리는 신앙을 잃고, 인생이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예술이 단순히 좌절된 욕망의 장식에 지나지 않고, 종교가 자기기만에 불과하다면 인생에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신앙은 모든 일에 해답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프로이트와 다윈과 함께 땅에 떨어져 버렸습니다. 우리는 방황하는 인간들이었고, 지금도 그렇습니다.&quot;</div>
<p>&nbsp;<a href="http://www.raybradbury.com/books/books.html">레이 브래드버리</a>의 『화성 연대기 The Martian Chronicles』는 아이작 아시모프처럼 과학에 기초한 sf보다는 환상문학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미국 서부개척시대의 복고풍 분위기나 앞의 인용처럼 종교적 에피파니(epiphany)도 물씬 풍기는 작품이지만 반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에도 그의 소설이 낡삭아 보이지 않는 것은 외려 과학 지식에 기초한 sf가 아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아이러니를 가지고 있다. 어쩌다 인종/여성차별에 대한 뉘앙스로 불편하기도 하지만 로버트 하인라인이나 에드가 라이스 버로스의 마초이즘에 비할 바는 아니다. 리사 터틀이나 조안나 러스, 어슐러 르 귄이 활동하기 전에 대체 그렇지 않은 작품이 없으니 르 귄이 &quot;SUR - 정복하지 않은 사람들&quot;에서 보인 관용으로(꼭 그것이어야 한다) 충분히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까뮈가 그르니에의 『섬』을 두고 &quot;오늘 처음으로 이 책을 열어보게 되는 저 낯모르는 사람을 뜨거운 마음으로 부러워한다.&quot;고 말했던가. 더도 덜도 말고 『섬』에 두른 이 휘장을 화성연대기에 덧댄다고 누가 나무랄 수 있을까. 이 『화성 연대기』로 인해 sf에 대한 내 편견은 산산조각이 났고 후에 번역된 거의 모든 sf를 보게 됐다. 그것은 다른 빛나는 SF 작가들과 조우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이다. 내게 단 한 명의 sf 작가를 꼽으라면 어슐러 k. 르 귄을 꼽을 것이지만 단 한편의 sf를 꼽으라면 『화성 연대기』를 꼽을 것이다.</p>
<p>&nbsp;<a href="http://antimine.kr/pic/bradbury.jpg" onclick="return hs.expand(this)" title="화성연대기" id="thumb1" class="highslide"><img height="186" width="124" src="http://antimine.kr/pic/bradbury.jpg" alt="" /></a><a href="http://antimine.kr/image/bradbury2.jpg" onclick="return hs.expand(this)" title="화성연대기2" id="thumb2" class="highslide"><img height="186" width="354" src="http://antimine.kr/image/bradbury2.jpg" alt="" /></a> </p>
<p>덧 - 『화성 연대기』는 모음사 동서추리문고 두 군데에서 나왔지만 오래전에 절판인 상태고 헌책방에서도 꽤 안 보이는 책이다. 모음사에서 87년과 90년 두 번에 걸쳐 나왔는데, 내가 가진 것은 90년 모음사 판이다. 이 판형은 책 표지를 바꾸면서 &lsquo;개정&rsquo;이니 &lsquo;재판&rsquo;이니 하는 표시가 없다. 뿐만 아니라 책 표지에 &lsquo;대이 브래드버리&rsquo;라는 우습지도 않은 실수를 했다, 정작 큰 실수는 마지막 한 페이지가 누락된 것이다. &ldquo;마이클이 말했다&rdquo; 마이클이 뭐라고 했는지 알고 싶으면 87년 판이나 동서추리문고 판을 찾아봐야 한다. 누구든 이 책을 읽는다면 마이클의 다음 말 때문만이 아니라 솟구치는 아드레날린을 주체할 수 없어서 당장에 도서관으로 달려갈 것이다. 헌데 도서관에도 90년 판밖에 없다면 굉장히 슬프겠지. </p>
<div style="padding: 5px 15px; color: rgb(51, 153, 102); text-align: justify;">마이클이 말했다. &ldquo;나는 화성인이 굉장히 보고 싶었어요. 어디 있지요, 아빠? 보여주겠다고 약속하셨잖아요.&rdquo; 아버지는 마이클을 어깨 위로 들어 올리더니 아래의 수면을 가리켰다. 화성인이 그곳에 있었다. 티머시는 바르르 떨기 시작했다. 화성인이 그곳에, 운하 속에, 물 위에 비치고 있었다. 티머시와 마이클과 로버트와 엄마와 아빠가....... 화성인들은 잔 파도가 찰랑거리는 수면을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었다.</div>
<p>브레드버리의 단편은 『플레이보이 sf걸작선』같은 모음집에 간간이 실려 있고, 외에도 『화씨451』과 『멜랑콜리의 묘약』『살아있는 공룡』이 번역됐으나 단행본들은 아쉽게도 죄다 절판이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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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헌책방 나들이 어떠세요?</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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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mmary type="text/plain">그런 날들이 있어요. 궁뎅이가 촐싹이며 마음까지 에부수수할 때 몸을 가볍게 하고 한적한 곳을 싸돌아 댕겨야, 겨우 책상머리에 앉아 할 일들을 주섬주섬 챙길 수 있죠. 간간이 학교에 갈 때나 일터에 가면서 헌책방을 지나치곤 했지만 ‘오늘은 헌책방에 가야지’라고 미리 다짐을 해두면서는 통 움직이지 않았거든요. 며칠 전부터 헌책방에 가야지하고 곱살지는데, “부깽 돈 없다며?” 라고 그루박아 말하더군요. 네 없어요. 그러나 자본주의는 돈 없는 나까지 슬겁게 대하는 미덕으로 신용카드를 추겼고 어찌하다 보니 빌붙고 있답니다. 뼈 빠지게 일하지는 않지만 달이 바뀌는 게 끌탕하긴 마찬가지예요. 기껏 해봐야 인터넷을 통해 책 몇 권 주문하고 어쩌다 커피 한 잔 하고, 오질라게 추운 날 자전거 대신 지하철을 이용한 게 다인데도 통장에 잔고가 빠지는 날이면 입질에 걸린 붕어처럼 파다닥 하다가 축 쳐지고 말아요. 그렇다고 참새가 포수 무서운 거까지 생각하면서 방앗간에 가겠어요. 우선 가고 보는 거죠. 카드가 없다고요? 그럴 땐 영풍이나 교보에 가서 몰래 영구 대출을 하는 게 좋죠. 여기서 ‘몰래’가 중요해요. 자기만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안 되죠. 쥐구멍에 머리 박고 ‘나 안 보이지’하는 것처럼 했다간 진짜 쥐처럼 하루 죙일 벽보고 무릎 꿇고 있어야 할걸요. 뭐든지 계획이 중요해요. 목욕재계하고 옷을 깔끔하게 입고, 괜히 잠바 앞 지퍼랑 열어 두지 말고 나볏하게 심호흡 한 번 하고 책방에 들어가세요. 좋아하는 코너에 가서 감시카메라의 위치와 직원들의 행동반경을 가늠해두고 시작하는 거죠. 책은 안 보고 게름 게름하며 그들의 좌표범위와 운동량을 확인했다고 하더라도 관찰자에 의해서 관찰 대상이 영향을 받는 불확정성의 원리를 잊어선 안 되겠죠. 그러다 기회다 싶으면 몬창몬창하지 말고 한 번에 휙~~ 참고로 부깽은 한 번도 못해본 일이에요. 그냥저냥 도서관에서 빌려보겠다고요? 네 반납기일을 지키는 것 잊지 마시고요. 겨울에 때 아니게 비 온다고 우산대용으로 쓰지 말고요, 아무리 리포트가 넘쳐도 밑줄...</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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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ATA[<p>그런 날들이 있어요. 궁뎅이가 촐싹이며 마음까지 에부수수할 때 몸을 가볍게 하고 한적한 곳을 싸돌아 댕겨야, 겨우 책상머리에 앉아 할 일들을 주섬주섬 챙길 수 있죠. 간간이 학교에 갈 때나 일터에 가면서 헌책방을 지나치곤 했지만 ‘오늘은 헌책방에 가야지’라고 미리 다짐을 해두면서는 통 움직이지 않았거든요. 며칠 전부터 헌책방에 가야지하고 곱살지는데, “부깽 돈 없다며?” 라고 그루박아 말하더군요. 네 없어요. 그러나 자본주의는 돈 없는 나까지 슬겁게 대하는 미덕으로 신용카드를 추겼고 어찌하다 보니 빌붙고 있답니다. 뼈 빠지게 일하지는 않지만 달이 바뀌는 게 끌탕하긴 마찬가지예요. 기껏 해봐야 인터넷을 통해 책 몇 권 주문하고 어쩌다 커피 한 잔 하고, 오질라게 추운 날 자전거 대신 지하철을 이용한 게 다인데도 통장에 잔고가 빠지는 날이면 입질에 걸린 붕어처럼 파다닥 하다가 축 쳐지고 말아요. 그렇다고 참새가 포수 무서운 거까지 생각하면서 방앗간에 가겠어요. 우선 가고 보는 거죠. 카드가 없다고요? 그럴 땐 영풍이나 교보에 가서 몰래 영구 대출을 하는 게 좋죠. 여기서 ‘몰래’가 중요해요. 자기만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안 되죠. 쥐구멍에 머리 박고 ‘나 안 보이지’하는 것처럼 했다간 진짜 쥐처럼 하루 죙일 벽보고 무릎 꿇고 있어야 할걸요. 뭐든지 계획이 중요해요. 목욕재계하고 옷을 깔끔하게 입고, 괜히 잠바 앞 지퍼랑 열어 두지 말고 나볏하게 심호흡 한 번 하고 책방에 들어가세요. 좋아하는 코너에 가서 감시카메라의 위치와 직원들의 행동반경을 가늠해두고 시작하는 거죠. 책은 안 보고 게름 게름하며 그들의 좌표범위와 운동량을 확인했다고 하더라도 관찰자에 의해서 관찰 대상이 영향을 받는 불확정성의 원리를 잊어선 안 되겠죠. 그러다 기회다 싶으면 몬창몬창하지 말고 한 번에 휙~~ 참고로 부깽은 한 번도 못해본 일이에요. 그냥저냥 도서관에서 빌려보겠다고요? 네 반납기일을 지키는 것 잊지 마시고요. 겨울에 때 아니게 비 온다고 우산대용으로 쓰지 말고요, 아무리 리포트가 넘쳐도 밑줄 쫙쫙 그어가며 짜깁기 흔적 남기지 말아 주세요. </p>

<p>씹떡껍떡한 소릴랑 그만하고 아저씨 말로는 1년하고 몇 개월 만에 찾았다는 <a href="http://home.freechal.com/booklover/02/2/21772353">일산 집현전</a>에 갔어요. 그 새는 아니지만 길 건너엔 2층 매장도 생겼네요. 『과거와 미래 사이』 『페미니즘의 도전』 『골렘-과학의 뒷골목』 등등의 책을 샀어요. 요 책들이 벌써 헌책방에 나왔느냐고요? 세상 살다 보면 책깡을 하는 사람도 있겠죠. :) 집현전 같은 경우는 예전에도 말했지만 새책들을 꽤 많이 보유하고 있어요. 아주마씨의 동생 되시는 분이 어디 출판사에 다녀요.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 출판단지도 있잖아요. 소문엔 교수들이 일산에 많이 산대요.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증정본이라고 해서 “누구누구 혜존”, 피 튀겨가며 책 사도 쟁여 놓기만 할 때가 있는데 지들이 공짜로 받은 책 다 읽겠어요. 여하튼 요런 이유와 아무런 상관없이 신간도 신간이지만 재고 도서라든지 새책 같은 헌책이 가장 많은 곳 중 하나가 집현전이랍니다. 직접 들러보세요. 참 b님을 위한 『캐치-22』도 샀어요. </p>

<p>가방에 책이 한 짐 가득이네요. 읽지도 않고 뿌듯해질 때는 요때뿐이죠. 작심하고 나왔으니 <a href="http://home.freechal.com/booklover/02/2/11542516">홍제동 대양서점</a>에도 들러야죠. 대양서점은 <a href="http://home.freechal.com/booklover/02/2/9078163">용산 뿌리서점</a>과 더불어서 책값이 참 싼 곳이에요. 아버지는 1매장 아들은 2매장을 운영하고 있는데 1매장은 여타의 동네 헌책방과 별다를 게 없이 이러루한데, 2매장은 헌책뿐만 아니라 오래된 lp와 골동품 얄개 영화포스터 같은 것이 한데 아우러 사뜻한 박물관 같아요. 널치난 몸도 쉬어가며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한 곳이죠. 대양에서 짬뽕을 시켜 주기에 맛나게 먹고, 커피로 입가심하고 인삼차를 후루룩 마시고 슬렁슬렁 책장을 기웃거리면서 몇 권의 책을 뽑았죠. 대양에도 한 코너에 새 책들이 즐비하지만 그보다는 구석구석 숨은 책들을 찾는 즐거움을 택하고, 그냥 보면 뭐하나 노느니 염불한다고 멀찍이 떨어져 있던 여성학 책들을 한데 추렸어요. 누군가에게 한 방의 축복이길 바라요. 대부분 새 책으로 구할 수 있겠지만 아예 검색이 안 되는 책들도 더러 있어요. 가지런히 꽂아 뒀으니 다녀와 보세요. </p>

<p>『다른 목소리로』 - 너무나 유명해서 그닥 할 말이 없지만 스타이넘이 요 책을 두고 “인간 사회에 여성의 삶을 끌어들임으로써 인간 사회 자체를 완결한 책”이라는 소문을 내고 다녔어요. 여하튼 여성학과 심리학의 발전에 큰 획을 그은 책이랍니다. 수 세기 동안 남성의 경험이 흡사 인류의 경험인양 사기 치던 기존의 발달 이론에 똥침을 가한 책이죠. </p>

<p>『남자가 월경을 한다면』 - 게센인이 아닌 이상 요걸로 위안 삼으세요. </p>

<p>『내부로부터의 혁명』 - 진즉에 절판인지라 검색해도 잘 안 나오는데, 글로리아 스타이넘이 인도에서 요가 배운 뒤에 여성들의 자존감 회복과 관련해서 쓴 것입니다. 1,2 권으로 나왔는데, 1권은 어쩌다 헌책방에서 반짝하는데 2권은 잘 안 보여요. 다니다 보면 만날 날이 있겠죠. 저도 몇 년 전 오늘처럼 무작정 다니다 우연히 만났던 책이에요. 요전에 봤던 벨 훅스의 『사랑의 모든 것』에서도 짧게나마 언급을 하고 있어요. </p>

<p>『페미니즘과 문학』 - 출판사에서는 더 못 찍을 테고, 대학 구내 서점 같은 곳에 재고가 남은 걸 본 적은 있어요. 일레인 쇼월터의 ‘페미니스트 비평 황야에 서다(다시 나왔지만)’나  크리스테바의 ‘정신분석과 폴리스’ ‘중심에 있는 어머니’ 등등 중요한 텍스트들이 실려 있어요.</p>

<p>『페미니즘 이론』 - 페미니즘의 교과서 같은 책이라죠. </p>

<p>『남성의 본질에 대하여』 - 요것은 『남자의 여성성에 대한 편견의 역사』란 제목으로 개정돼서 다시 나왔어요. 안 읽어 봐서 올마나 바뀌었는가는 모르겠네요. </p>

<p>『타고난 성, 만들어진 성』 - 성 정체성에 대한 ‘nature’냐, ‘nurture’냐 하는 논쟁을 불러일으킨 책이죠. </p>

<p>외에도 『현대 여성 해방 사상』 『가족은 반사회적인가』 『페미니즘과 종교』 『한국의 여성과 남성』『여성해방의 이론 체계』 등등 다양한 여성학 관련 책이 즐비하더군요. </p>

<p>암암한 기억을 좀 더 쥐어짜 보면 페미니즘 서적 외에도 몇몇 특별한 책들이 있었어요. 가령 김산호의 『대쥬신제국사(大朝鮮帝國史)』 1,2,3, 양장케이스 같은 것 말이죠. 찾던 사람에게는 춤출 일인데 모르는 사람에게는 짐이죠. 9만 얼마였던 책값이 올라서 12만 원이나 하는 책인데, 책값이야 엿장수 맘이라고 1/3 가격 혹은 말 잘하면 1/4에 살 수 있을 거예요 . 상고사를 다루는데 내용도 재미난 것은 물론이고, 만화도 스펙터클이 될 수 있다는 살아있는 증거죠.  </p>

<p>그리고! 『모피를 입은 비너스』도 있었어요. 요것은 들뢰즈 『매저키즘』에 부록으로 실려 있긴 하지만 ‘인간사랑’보다 ‘과학과사상’의 번역이 더 잘 읽혔어요. 게다가 표지도 더 이쁜걸요! 사드에게 『안방철학』(규방철학이라는 제목으로 새로 나왔더군요)이 있다면 마조흐에겐 『모피를 입은 비너스』가 있죠. </p>

<p>당연히 기억 못 하는 책이 훨씬 더 많아서 뭐가 더 있는지는 역시나 직접 나들이하시는 수밖에 없어요. 두 책방의 약도는 <a href="http://home.freechal.com/booklover/02/2/11542516">홍제동/대양서점</a>, <a href="http://home.freechal.com/booklover/02/2/21772353">일산/집현전</a>을 참고 하세요. </p>

<p><a  id="thumb1" href="http://antimine.kr/pic/amazon.jpg" class="highslide" onclick="return hs.expand(this)" title="아마조네스"><img src="http://antimine.kr/pic/amazon.jpg" width="150" height="224"  alt=""/></a><a  id="thumb2" href="http://antimine.kr/image/avant.jpg" class="highslide" onclick="return hs.expand(this)"  title="아방가르드 예술 이론"><img src="http://antimine.kr/image/avant.jpg" width="150" height="223"  alt="" /></a></p>

<p>부깽은 대양 서점에서 저 많은 유혹을 뿌리치고 『아방가르드 예술이론』과 『아마조네스의 꿈』을 샀어요. 『아방가르드 예술이론』은 86년에 출간된 것인데 같은 해에 『전위예술의 새로운 이해』라는 제목으로도 심설당에서 나왔었죠. 이미 제본한 것을 가지고 있는데, 무척 어렵게 ‘독해해야’했던 책이었죠. 두 번역을  비교해 보았는데, 적절하게 합치면 잘 읽어낼 수 있을 것 같아요. 다시 기회가 있을랑가는 모르겠네요. 원저의 제목을 그대로 따른 『아방가르드 예술이론』은 영어를 중역한 것이고, 『전위예술의 새로운 이해』는 독어를 번역한 것인데, 때로는 중역이 더 훌륭할 때가 있기 마련이죠. 도스또예쁘스끼의 범우사판과 열린책들판을 생각해 보세요. </p>

<p>『아마조네스의 꿈』은 바바라 워커의 소설이에요. 원제는 짐작하신대로 ‘아마존Amazon’이에요. 『흑설공주 이야기』같은 동화 뒤집어 보기로 잘 알려져 있는데, ‘아마존’도 일찍 번역이 됐네요. 안티오페라는 여성왕국 아마존의 무사가 20세기 미국의 고속도로에서 떨어지면서 생기는 일이에요. 이거 내용을 말하기 아쉬울 정도로 옛날 수업 중에 몰래 반찬 집어 먹던 달근달근한 게 있네요. :)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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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성과 텍스트의 정치학</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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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mmary type="text/plain"><![CDATA[ 페미니즘 비평을 큰 틀 안에서 보자면 가부장적인 윤리적/인식론적 가설 토대를 드러내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소위 ‘객관적 권위’에 대해 의문을 표출하는 방식으로 그 ‘객관성’과 ‘권위’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문’을 제시하는 방법론은 페미니스트마다 제 각각의 입장을 견지하며 발전해 왔다. 『성과 텍스트의 정치학』에서 토릴 모이는 유물론적 페미니즘 전통 아래서 영/미 페미니즘이론과 프랑스 페미니즘 이론에 대한 비판적 거리 두기를 시도하고 있다. 영/미 구분에 대해 자넷 토드의 지적대로 사회주의적 전통에 있는 ‘영국 페미니즘’과 ‘미국(백인 중산층 여성의) 페미니즘’을 하나로 묶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토릴 모이의 ‘영/미’와 ‘프랑스’ 구분은 그들이 활동하는 지적 전통하에서 텍스트의 접근 방법을 토대로 하니 이를 문제 삼을 필요는 없다. 모이는 경험주의적 전통에 있는 일레인 쇼월터, 케이트 밀렛, 메어리 엘만, 샌드라 길버트&amp;수잔 구바와 이에 대비되는 반본질주의적 특성을 갖는 엘렌 식수, 뤼스 이리가레,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텍스트 등을 분석하고 있다. 모이는 이들 텍스트의 탈정치화된 독해법에 대립해서 정치화된 독해법을 증명해 내려고 하고 있다. 즉, 페미니즘 비평의 의의를 이론이나 방법론 차원을 넘어 정치성의 차원에서 찾으려는 시도인 셈이다. 이는 페미니즘 비평에서 완전히 새로운 제3의 태도를 제시한다기보다는 담론의 장(싸움의 장)을 만들어 내는 것에 가깝다. 이 책의 역자들은 모이가 주장하는 “페미니스트 정치학이라는 것이 수사적인 의미 외에 어떤 정치적 힘을 지니는지”에 회의를 가지며 거리 두기를 하는데, 모이가 드러내려고 했던 것은 페미니즘들 사이에서 부재한 ‘비판적 논쟁’을 끌어내려는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크리스테바는 「여성의 시간」에서 ‘차이’의 담화와 이에 대립하는 거울의 영상으로서 ‘평등’의 담화 그리고 이 모두를 극복하는 해체와 초월의 ‘제3의 공간(세대)’을 제시한다. 제3공간은-공간인 가운데 욕망을 갖는 정신의 공간으로- 모든 성적 정체성, 이분법적인 대립물, 모든 가부장적인 행태는 ‘형이상학’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토릴 모이는 크리스테바의 이론에 상당히 빚지고 있지만 ‘차이’와...]]></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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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ATA[<p><a href="http://antimine.kr/pic/11003.jpg"  class="highslide" onclick="return hs.expand(this)" title="성과 텍스트의 정치학"><img src="http://antimine.kr/pic/11003.jpg" width="153" height="225" alt="성과 텍스트의 정치학" /></a><br />
<br /></p>

<p>페미니즘 비평을 큰 틀 안에서 보자면 가부장적인 윤리적/인식론적 가설 토대를 드러내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소위 ‘객관적 권위’에 대해 의문을 표출하는 방식으로 그 ‘객관성’과 ‘권위’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문’을 제시하는 방법론은 페미니스트마다 제 각각의 입장을 견지하며 발전해 왔다. 『성과 텍스트의 정치학』에서 토릴 모이는 유물론적 페미니즘 전통 아래서 영/미 페미니즘이론과 프랑스 페미니즘 이론에 대한 비판적 거리 두기를 시도하고 있다. 영/미 구분에 대해 자넷 토드의 지적대로 사회주의적 전통에 있는 ‘영국 페미니즘’과 ‘미국(백인 중산층 여성의) 페미니즘’을 하나로 묶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토릴 모이의 ‘영/미’와 ‘프랑스’ 구분은 그들이 활동하는 지적 전통하에서 텍스트의 접근 방법을 토대로 하니 이를 문제 삼을 필요는 없다. 모이는 경험주의적 전통에 있는 일레인 쇼월터, 케이트 밀렛, 메어리 엘만, 샌드라 길버트&amp;수잔 구바와 이에 대비되는 반본질주의적 특성을 갖는 엘렌 식수, 뤼스 이리가레,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텍스트 등을 분석하고 있다. 모이는 이들 텍스트의 탈정치화된 독해법에 대립해서 정치화된 독해법을 증명해 내려고 하고 있다. 즉, 페미니즘 비평의 의의를 이론이나 방법론 차원을 넘어 정치성의 차원에서 찾으려는 시도인 셈이다. 이는 페미니즘 비평에서 완전히 새로운 제3의 태도를 제시한다기보다는 담론의 장(싸움의 장)을 만들어 내는 것에 가깝다. 이 책의 역자들은 모이가 주장하는 “페미니스트 정치학이라는 것이 수사적인 의미 외에 어떤 정치적 힘을 지니는지”에 회의를 가지며 거리 두기를 하는데, 모이가 드러내려고 했던 것은 페미니즘들 사이에서 부재한 ‘비판적 논쟁’을 끌어내려는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p>

<p><br /></p>

<p>크리스테바는 「여성의 시간」에서 ‘차이’의 담화와 이에 대립하는 거울의 영상으로서 ‘평등’의 담화 그리고 이 모두를 극복하는 해체와 초월의 ‘제3의 공간(세대)’을 제시한다. 제3공간은-공간인 가운데 욕망을 갖는 정신의 공간으로- 모든 성적 정체성, 이분법적인 대립물, 모든 가부장적인 행태는 ‘형이상학’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토릴 모이는 크리스테바의 이론에 상당히 빚지고 있지만 ‘차이’와 ‘평등’이 단순히 대립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가 ‘평등’을 필수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 경우 ‘형이상학’을 해체한다고 했을 때, 차이와 평등의 페미니즘 논리 또한 해체 위기를 맞게 된다. 크리스테바에게 세 가지 페미니즘 공간들은 논리적으로 혹은 전략적으로 양립하지 못하는 것이었지만 모이는 크리스테바와는 달리 이 세 가지 입장을 한 공간에 모두 견지하고자 한다. 논쟁적으로 어느 한 가지 입장을 택하는 동시에 차이, 평등, 제3공간 페미니즘의 모순점들을 극복해 가는 것이다. 가령 스피박이 『다른 세상에서』를 통해 보인 텍스트 전략- 마르크스의 잉여가치설, 재생산에 대한 페미니즘적 논의,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 그리고 식민지 주체에 대한 포스트구조주의 이론들이 동시에 불거져 나와 갈등상태에 놓이게 된 것-처럼 “서로를 위기로 몰아 서로를 치명적으로 방해하는” 여러 담론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를 통해 잇달아 생기는 위기는 선형적인 연속성을 파괴하고 주체와 주체의 담론들이 탈중심화하려는 욕망을 도발시킬 수 있을 것이다. 엘리자베스 그로츠는 「존재론의 연막」에서 이와 유사한 문제의식을 제기한 바 있다. 어떤 이론이든 한 입장에 서서 모든 영역의 이론을 완전히 포괄할 수는 없는 법이다. 어떤 입장을 택한다는 것은 ‘신중하게 틀릴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입장을 제시하고 전략적으로 특정한 주장을 발전시켜 간다는 것은 언제나 경쟁 위치에 있는 다른 입장들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부정하며 배제한다는 데에서 페미니즘‘들’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단 하나의 ‘올바른 페미니즘’이 있을 수 있겠는가? </p>

<p><br /></p>

<p>덧붙이 - 『성과 텍스트의 정치학』은 페미니즘이론에 대한 개괄서로도 손색이 없는데, 좀 더 쉽게 접하려면 소피아 포카의 『포스트페미니즘』과 라캉(5장)에 관한 보론 격으로 엘리자베스 라이트의 『라캉과 포스트페미니즘』을 먼저 읽으면 도움이 될 듯싶다. 둘 다 매우 가벼운 책이다. 여기서 ‘가벼운’은 물리적 무게이다. 토릴 모이에 대한 다른 번역으로는 『페미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한신』에 「페미니즘, 포스트모더니즘 그리고 문체」가 실려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덤으로 가장 읽고 싶었던 텍스트는 샌드라 길버트와 수잔 구바의 『다락방의 미친 여자』그리고  뤼스 이리가레의 『타자인 여성의 반사경』이다. 대부분의 페미니즘 이론서에서 『다락방의 미친 여자』를 언급 하고 있지만 그 첫 장이 『현대문학 비평론/한신』에 ‘에밀리 브론테’에 관한 「마주 향해 바라보기」가 『영미여성 소설론/정우사』에 번역됐을 뿐이다. 더 있을지 모르겠는데 내 방에는 없다. 제발 번역 좀 해주면 꼭 “새”책으로 사서 읽으마. 무수히 많은 전공자를 두고, 없는 능력 시간 쏟아가며 원서로 읽기엔 왠지 좀 억울하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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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책방 나들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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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mmary type="text/plain"><![CDATA[하늘은 흐리멍텅 춥기는 오질라게 춥고 오랜만에 교보를 향해 활보할까 종각지하도를 나서는데 바람이 휙 하고 으스스 속삭이더라. 따뜻한 지하도와 연결되는 영풍으로 가라고. 나는 왜 다른 사람들보다 추위를 더 탈까 아무리 고민해 봤자, 결론은 쿨맥스 액티브 내복밖에 떠오르는 게 없고, 그렇다고 여름에 더위를 안 타는 것도 아니고, 날씨는 사시사철 징글맞게 나와는 멀어져만 간다. 나이 탓을 해보고 싶지만 울 엄니도 안 춥다는데 감히. 나는 한낮의 섭씨 25도 여름과 휘몰아치는 바람에도 체감 -1도의 겨울을 좋아할 뿐이다. 여하튼 따신 영풍에서 오랜만에 ‘새’ 책 냄새를 맡으며 코너마다 기웃거려본다. 원래는 몇 권 생각해 둔 게 있었는데, 결국 손에 들고 나온 것은 의외의 두 권이다. 롤랑 바르트 『목소리의 결정-원제 Le grain de la voix 목소리의 씨앗』과 파스칼 브뤼크네르와 알랭 핑켈크로가 같이 쓴 『길모퉁이에서의 모험』. 죄다 사랑할 수밖에 없는 작가들이다. 바르트가 만난 역자들은 들쑥날쑥했지만 외의 두 사람은 동문선에서 나오면서도 지금까지 좋은 역자를 만나는 복 아닌 복을 누렸다. 『목소리의 결정』은 롤랑 바르트의 대담집인데 이전에 『텍스트의 즐거움』에 실렸던 「스티븐 히스와의 대담」과 「롤랑 바르트의 주요어 20개」 「지식인은 무엇에 소용되는가」가 중복되어 있다. 말하기는 그 상대에 따라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쓰기보다 좀 더 명확하게 사유를 가로지르곤 한다. 대담집의 장점이라면 여러 대담자가 ‘하나의 목소리’를 적절히 상대화시킴으로써 더욱 객관적인 진실을 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바흐친이 말하는 것처럼 대립하는 다양한 의식이나 목소리 사이에 존재하는 ‘대화적 관계’를 통해 ‘축제적 다성성’이 펼쳐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상당히 심심하지 않을 책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조금 아쉽다면 이 책에서는 프랑스 퀼튀르 라디오에서 진행했던 모리스 나도와의 대담은 들어 있지 않다. 이전에 『문학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란 제목으로 출판된 적이 있는데, 바르트를 이해하는데 가장 좋은 입문서 중 하나일 것이다. &nbsp;...]]></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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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ATA[<p>하늘은 흐리멍텅 춥기는 오질라게 춥고 오랜만에 교보를 향해 활보할까 종각지하도를 나서는데 바람이 휙 하고 으스스 속삭이더라. 따뜻한 지하도와 연결되는 영풍으로 가라고. 나는 왜 다른 사람들보다 추위를 더 탈까 아무리 고민해 봤자, 결론은 쿨맥스 액티브 내복밖에 떠오르는 게 없고, 그렇다고 여름에 더위를 안 타는 것도 아니고, 날씨는 사시사철 징글맞게 나와는 멀어져만 간다. 나이 탓을 해보고 싶지만 울 엄니도 안 춥다는데 감히. 나는 한낮의 섭씨 25도 여름과 휘몰아치는 바람에도 체감 -1도의 겨울을 좋아할 뿐이다. 여하튼 따신 영풍에서 오랜만에 ‘새’ 책 냄새를 맡으며 코너마다 기웃거려본다. 원래는 몇 권 생각해 둔 게 있었는데, 결국 손에 들고 나온 것은 의외의 두 권이다. 롤랑 바르트 『목소리의 결정-원제 Le grain de la voix 목소리의 씨앗』과 파스칼 브뤼크네르와 알랭 핑켈크로가 같이 쓴 『길모퉁이에서의 모험』. 죄다 사랑할 수밖에 없는 작가들이다. 바르트가 만난 역자들은 들쑥날쑥했지만 외의 두 사람은 동문선에서 나오면서도 지금까지 좋은 역자를 만나는 복 아닌 복을 누렸다. 『목소리의 결정』은 롤랑 바르트의 대담집인데 이전에 『텍스트의 즐거움』에 실렸던 「스티븐 히스와의 대담」과 「롤랑 바르트의 주요어 20개」 「지식인은 무엇에 소용되는가」가 중복되어 있다. 말하기는 그 상대에 따라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쓰기보다 좀 더 명확하게 사유를 가로지르곤 한다. 대담집의 장점이라면 여러 대담자가 ‘하나의 목소리’를 적절히 상대화시킴으로써 더욱 객관적인 진실을 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바흐친이 말하는 것처럼 대립하는 다양한 의식이나 목소리 사이에 존재하는 ‘대화적 관계’를 통해 ‘축제적 다성성’이 펼쳐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상당히 심심하지 않을 책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조금 아쉽다면 이 책에서는 프랑스 퀼튀르 라디오에서 진행했던 모리스 나도와의 대담은 들어 있지 않다. 이전에 『문학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란 제목으로 출판된 적이 있는데, 바르트를 이해하는데 가장 좋은 입문서 중 하나일 것이다.</p>

<p>&nbsp;<a id="thumb1" href="http://antimine.kr/pic/11002.jpg" class="highslide" onclick="return hs.expand(this)" ><img src="http://antimine.kr/pic/11002.jpg" width="153" height="224" alt="image" /></a><a id ="thumb2" href="http://antimine.kr/image/11001.jpg" class="highslide" onclick="return hs.expand(this)" ><img src="http://antimine.kr/image/11001.jpg" width="153" height="223" alt="image" /></a><a id="thumb3" href="http://antimine.kr/pic/11003.jpg" class="highslide" onclick="return hs.expand(this)"><img src="http://antimine.kr/pic/11003.jpg" width="153" height="225" alt="image" /></a>
</p>
<br />]]>
<![CDATA[<p>『길모퉁이에서의 모험』은 『사랑의 새로운 무질서 Le nouveau désordre amoureux』이후에 브뤼크네르와 핑켈크로가 또다시 공저한 에세이이다. 1979년에 나온 에세이니 한참 지난 셈이다. 이제는 더는 나만 좋아하는 작가가 아닌 파스칼 브뤼크네르나 앨랭 핑켈크로를 말할 때면 흡사 짝사랑하던, 이름 없는 영화의 조연이 150개의 스크린을 몰고 오는 대형스타로 우뚝 섰을 때의 섭섭함이 묻어온다. 무수히 많은 밤 동안 아드레날린의 분비를 꾹꾹 눌러가며 책장을 한 장 넘기는 게 아까워서 읽는 내내 조마조마했던 시간을 떠올리면 더더욱 그렇다. 알랭 핑켈크로의 번역은 이 책까지 네 권이 나온 셈이다. 『잃어버린 인간성』 『사랑의 지혜』 『사유의 패배』 헌데 검색하면 한 번에 주르륵 나오지 않는다. 이름 표기가 워낙 들쑥날쑥해서 말이지. 여하튼 저 책을 쓴 사람은 분명히 다 같은 사람이다. </p>

<p><br />
그리고 어쩌다 헌책방에 가서 책을 한 권 샀다. 춥기도 춥고 날마다 빈손으로 나오기가 머쓱해서 근래는 통 걸음 하지 않았는데 인사나 여쭐까 해서 갔다가 이왕 온 거 두루두루 구경하다가 한 권 샀다. 토릴 모이 『성과 텍스트의 정치학』 처음 페미니즘에 대해 세미나를 했던 책인지라 의미가 남다른데, 한 10년 전쯤 가방을 납치당했을 때 그 안에 들어 있던 몇 권의 책 중 하나였다. 요 책이 그 책은 아니지만 여하튼 귀환을 축하하며 절판된 페미니즘 도서들을 조만간 올려야지. </p>

<p>미리미리 메리 크리스마스 ~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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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적군/PFLP: 세계전쟁선언</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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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mmary type="text/plain"><![CDATA[ &nbsp;&nbsp; 적군/PFLP: 세계전쟁선언 &nbsp;&nbsp; Red army/PFLP: Declaration of World War &nbsp;&nbsp; 赤軍－ＰＦＬＰ 世界戦争宣言 &nbsp;&nbsp; 아다치 마사오 足立正生 &nbsp;&nbsp; 와카마츠 코지 若松孝二 &nbsp;&nbsp; 1971 | 16mm&nbsp; | 71min&nbsp; | 일본 영화와 혁명 특별전을 통해 &lsquo;적군/PFLP - 세계전쟁선언&rsquo;을 봤다. 영화라기보다는 프로파간다였지만 간혹 문자로만 접하던 적군파의 활동을 영상으로 본다는 것은 퍽 흥미진진한 일이다. 게다가 국보법이 서슬 퍼렇게 살아있는 남한 땅에서 이런 &lsquo;적군파&rsquo;를 공개적으로 감상할 수 있다니, 여러모로 재미난 일이랄 밖에. 69년 일본의 도쿄대와 일본대를 중심으로 했던 전공투 운동이 경찰력에 의해 봉쇄당하면서 무장봉기와 군사적 행동으로 활로를 모색하려는 이들이 나타났는데 그들이 바로 적군파이다. 제목에서와같이 적군파의 슬로건은 세계전쟁선언이다. 그들은 이전의 활동을 혁명적 패배주의로 간주하고 전단계 무장봉기 - 세계 혁명전쟁, 세계 黨 - 세계 적군 - 세계 혁명 전선이라는 새로운 노선을 내건다. 영화 초반에 보이는 대로 적군파는 창설 직후 對 권력투쟁으로서 파출소 습격, 무기 탈취, 69년 10월 국제 반전 시위에서는 쇠 파이프 폭탄으로 신주쿠 역을 습격하는 등 무력시위를 감행한다. 그러나 11월 수상관저 습격을 목적으로 군사훈련을 하던 중 경찰 측에 알려져 53명이 체포되며 큰 타격을 입는다. 이 사건으로 궤멸 직전까지 갔던 적군파는 이후 도쿄 집회를 통해 &lsquo;국제 근거지 건설, 70년 전단계 봉기 관철&rsquo;을 계획하고 이를 실행하는 데 그중 하나가 &lsquo;불사조 작전&rsquo;이라고 불렸던 일본 항공기 요드호 납치 사건이다. 70년 3월 31일 9명의 적군파 멤버는 후지 산 상공을 날고 있던 일본 항공 보잉 727기를 납치 북한행을 요구한다. 그 비행기에는 7명의 승무원과 131명이 승객이 탑승하고 있었다. 급유를 요구하며 후쿠오카 공항에 착륙했던 요도호는 환자와 여성, 어린이들 23명을 내려놓은 후 북한을 향해 비행한다. 그런데 wikipedia를 보니 이들이 도착한 곳은 김포공항이다. 처음엔 뭔가 잘못 적혔나 싶어서 먼지 쌓인 책을 뒤져보니 할리우드 영화 같은...]]></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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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ATA[<div style="padding: 3px 15px 10px 5px; float: left;"><img height="267" width="190" src="http://antimine.kr/pic/sekigunPFLP.jpg" alt="image" /> </div>
<br />
<br />
<br />
<strong>&nbsp;&nbsp; 적군/PFLP: 세계전쟁선언 <br />
&nbsp;&nbsp; Red army/PFLP: Declaration of World War <br />
&nbsp;&nbsp; 赤軍－ＰＦＬＰ 世界戦争宣言 </strong><br />
<br />
&nbsp;&nbsp; 아다치 마사오 足立正生 <br />
&nbsp;&nbsp; 와카마츠 코지 若松孝二 <br />
&nbsp;&nbsp; 1971 | 16mm&nbsp; | 71min&nbsp; | 일본<br style="clear: both;" />
영화와 혁명 특별전을 통해 &lsquo;적군/PFLP - 세계전쟁선언&rsquo;을 봤다. 영화라기보다는 프로파간다였지만 간혹 문자로만 접하던 적군파의 활동을 영상으로 본다는 것은 퍽 흥미진진한 일이다. 게다가 국보법이 서슬 퍼렇게 살아있는 남한 땅에서 이런 &lsquo;적군파&rsquo;를 공개적으로 감상할 수 있다니, 여러모로 재미난 일이랄 밖에.
<p>69년 일본의 도쿄대와 일본대를 중심으로 했던 전공투 운동이 경찰력에 의해 봉쇄당하면서 무장봉기와 군사적 행동으로 활로를 모색하려는 이들이 나타났는데 그들이 바로 적군파이다. 제목에서와같이 적군파의 슬로건은 세계전쟁선언이다. 그들은 이전의 활동을 혁명적 패배주의로 간주하고 전단계 무장봉기 - 세계 혁명전쟁, 세계 黨 - 세계 적군 - 세계 혁명 전선이라는 새로운 노선을 내건다. 영화 초반에 보이는 대로 적군파는 창설 직후 對 권력투쟁으로서 파출소 습격, 무기 탈취, 69년 10월 국제 반전 시위에서는 쇠 파이프 폭탄으로 신주쿠 역을 습격하는 등 무력시위를 감행한다. 그러나 11월 수상관저 습격을 목적으로 군사훈련을 하던 중 경찰 측에 알려져 53명이 체포되며 큰 타격을 입는다. 이 사건으로 궤멸 직전까지 갔던 적군파는 이후 도쿄 집회를 통해 &lsquo;국제 근거지 건설, 70년 전단계 봉기 관철&rsquo;을 계획하고 이를 실행하는 데 그중 하나가 &lsquo;불사조 작전&rsquo;이라고 불렸던 일본 항공기 요드호 납치 사건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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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padding: 0px 5px 10px 15px; float: right;"><img height="146" width="200" src="http://antimine.kr/image/wd249cc4.jpg" alt="image" /></div>
70년 3월 31일 <a href="http://en.wikipedia.org/wiki/Japanese_Red_Army">9명의 적군파 멤버</a>는 후지 산 상공을 날고 있던 일본 항공 보잉 727기를 납치 북한행을 요구한다. 그 비행기에는 7명의 승무원과 131명이 승객이 탑승하고 있었다. 급유를 요구하며 후쿠오카 공항에 착륙했던 요도호는 환자와 여성, 어린이들 23명을 내려놓은 후 북한을 향해 비행한다. 그런데 <a href="http://en.wikipedia.org/wiki/Japanese_Red_Army">wikipedia</a>를 보니 이들이 도착한 곳은 김포공항이다. 처음엔 뭔가 잘못 적혔나 싶어서 먼지 쌓인 책을 뒤져보니 할리우드 영화 같은 상황이 전개됐던 것이다. 요도호는 후쿠오카 공항을 이륙해서 북한으로 가는 중에 남한공군기에 유도되어 김포공항에 착륙한다. 적군파가 마음을 바꿔서 당시 자유민주주의 개발독재 다카키 마사오의 나라에 온 것은 아니고 남한 측이 북한인 척 위장했던 것이다. 남한은 북한군 복장을 하고 가짜 환영 플래카드를 들고 나타났건만 적군파가 이를 알아차리고 대치 상태에 들어간다. (이런 심각한 상황에서 키득거리면 죄스럽지만, 환영플래카드가 펄럭이고 북한군인 척 행세를 했던 남한군들을 생각하면 좀처럼 웃음이 멈추질 않는다. ㅋㅋ) 남한 측과의 협상을 결렬되고, 4월 1일 도쿄에서 날아온 야마무라 일본 운수차관이 적군파와 교섭을 재개한다. 기내투쟁을 벌이던 적군파 9명은 야마무라의 인질 맞교환 제안을 수용, 야마무라와 승무원 3명을 제외한 인질 전원을 석방하고 4월 3일 오후 평양으로 향한다. 평양에 도착한 직후 요도호는 다시 야마무라 차관과 승무원 3명을 태우고 4일 하네다 공항에 무사히 귀환한다.
<p>무사히 귀환? 그렇다면, 영화에서 폭발한 비행기는 어떤 것이었을까? 이후 적군파가 또다시 하이재킹을 시도한 것은 73년 7월 20일 마루오카와 팔레스타인 4명이 파리 발 하네다 행 일본 항공 점보 404기를 납치한 것이다. 이들은 &lsquo;일본과 팔레스타인 혁명을 결합하는 세계 혁명전쟁&rsquo;이라 부르며 3일간에 걸쳐 아랍에미리트 두바이 공항, 다마스커스 공항 등을 거쳐 리비아의 벵가지 공항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인질 141명을 풀어주고 항공기를 폭파한다. 영화는 71년에 만들어졌다고 하니 이리되면 또 아귀가 맞질 않는다. 누가 알려다오, 더는 엄한 나라말들 찾아다니기 지친다. </p>
<div style="padding: 0px 15px 10px 5px; float: left;"><a class="highslide" id="thumb2" title="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onclick="return hs.expand(this)" href="http://antimine.kr/pic/SEKIGUN2.jpg"><img width="200" alt="세계전쟁선언" src="http://antimine.kr/pic/SEKIGUN2.jpg" /></a></div>
<p>영화는 &lsquo;모든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rsquo;는 모택동의 사상을 그대로 승계하며 무장봉기와 하이재킹을 선동하고 있다. 중간부터는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PFLP)의 활동(혁명에서 &lsquo;개인&rsquo;은 반동일 뿐이다. 그들의 일상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날마다 총검술을 한다거나 총구분해 조립 등등의 반복이다.)을 주로 보여주는데, 감독 중 아다치 마사오는 74년 PFLP에 직접 투신 영화처럼 살았단다.(또 다른 감독 와카마츠 코지가 어찌 지내는지 궁금하면 <a href="http://www.roots-magazine.com/rwm/2008/02/post_22.html">여기를</a>). 인터내셔널가가 3번 울린 것을 제외하고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반시오니즘 반제국주의 반미 등등으로 덧칠한 비행기를 폭파하는 영상인데, 대체 그게 어떤 사건이었는지 갈피를 못 잡겠다.</p>
<p>이제는 빛바랜 혁명전사들인데, 그게 또 불편하기도 했는데, <a href="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amp;id=33646">하이텍알씨디 고공농성장에 투입된 경찰특공대</a>를 보면 적군파처럼 하는 것도 방법이 될 것 같단 말이지. &lsquo;Coup pour Coup! 주먹에는 주먹!&rsquo;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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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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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dified>2009-02-15T15:04:21Z</modified>
<issued>2005-08-07T20:40:29Z</iss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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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mmary type="text/plain"> 신촌의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교실에 가만히 앉아 있다. 언제나 구석진 자리에서, 풍경처럼만 자리한다. 조리개 값 1.2, 중앙에 초점을 맞춘 사진에서 맨 구석 희미하게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반 친구들에게 어쩌다 하고 싶은 말들은 혀끝을 맴돌다 이내 수그러든다. 말이 적은 편이었냐고? 말은 끊이질 않는다. 다만 소리가 되지 않을 뿐이다. 누구에게도 말을 걸지 않는다. 명동에서 어렵게 더빙해온 일본 판 애니메이션에 대해서도, 국어 선생이 신촌 한 여관에 술이 떡이 되어 들어가는 모습도. 크리스탈 백화점 앞에서 눈이 오기를 기다렸다는 말도 혼자서만 앙잘거릴 뿐이다. 끊임없이 수다를 떨고 싶었지만 모든 게 안 해도 될 말이다. 결국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졸업을 한다. 아무 말이나 하고 싶었다. 그냥 수다를 떨고 싶었다. 필요 없는 말이면 어떠냐고, 그 말에서 다른 마음이 생길 줄 아느냐고, 그렇게 마음이 생기면 또 말을 하면 되지 않느냐고, 그렇게 이어가고 싶었다. ‘중요한 게 아니잖아?’ 라고 어디선가 들려오곤 했다. ‘응, 중요하지 않아’ 하고는 입을 닫았다. 그렇게 쓸데없다고 믿었던 말들은 성대를 울리지 못했고, 말들이 잊혀 졌고, 기억이 잊히고, 마음을 잃었다. 김종삼과 김민정의 시를 번갈아 읽는다. 김종삼의 시는 소리가 없다. 어디선가 북소리가 들려올 것도 같았지만, 피아노 반주도 변사도 없는 무성영화처럼 펼쳐진다. 그래도 말은 그림이 된다. 김민정의 시는 끊임없이 조잘대는 말들이 좀처럼 여백을 만들어 내지 않고 있다. 그의 수다는 북적이는 선술집의 성가신 소음이 아니라 주변적인 것들에 무게를 두고 반짝이고 있다. 뻥긋하는 금붕어라니, 천만에 &apos;반짝거리는 수다&apos;이다. 이런 수다! 좀처럼 우아하지 않게 그러면서 말하기 거북했던 것들을, 쓸데없다고 믿던 것들을 아무렇게나 혹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토해내고 있다. 옆자리의 통화를 엿듣는 모양새로 그의 시를 읽고 있자면 아니꼽살스럽다는 듯이, 말들은 확성기를 들이댄 야채장수처럼 소리 지르고 있다. 그의 말들은 가볍지만, 그로 상상력은 경계를 넘어...</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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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ATA[<div style="padding-right: 15px; padding-left: 5px; float: left; padding-bottom: 10px; padding-top: 0px"><a href="http://antimine.kr/pic/kimminjung.jpg" onclick="return hs.expand(this)" title="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 id="thumb2" class="highslide"><img width="200" src="http://antimine.kr/pic/kimminjung.jpg" alt="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 /></a></div>
신촌의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교실에 가만히 앉아 있다. 언제나 구석진 자리에서, 풍경처럼만 자리한다. 조리개 값 1.2, 중앙에 초점을 맞춘 사진에서 맨 구석 희미하게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반 친구들에게 어쩌다 하고 싶은 말들은 혀끝을 맴돌다 이내 수그러든다. 말이 적은 편이었냐고? 말은 끊이질 않는다. 다만 소리가 되지 않을 뿐이다. 누구에게도 말을 걸지 않는다. 명동에서 어렵게 더빙해온 일본 판 애니메이션에 대해서도, 국어 선생이 신촌 한 여관에 술이 떡이 되어 들어가는 모습도. 크리스탈 백화점 앞에서 눈이 오기를 기다렸다는 말도 혼자서만 앙잘거릴 뿐이다. 끊임없이 수다를 떨고 싶었지만 모든 게 안 해도 될 말이다. 결국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졸업을 한다. 

<p>아무 말이나 하고 싶었다. 그냥 수다를 떨고 싶었다. 필요 없는 말이면 어떠냐고, 그 말에서 다른 마음이 생길 줄 아느냐고, 그렇게 마음이 생기면 또 말을 하면 되지 않느냐고, 그렇게 이어가고 싶었다. ‘중요한 게 아니잖아?’ 라고 어디선가 들려오곤 했다. ‘응, 중요하지 않아’ 하고는 입을 닫았다. 그렇게 쓸데없다고 믿었던 말들은 성대를 울리지 못했고, 말들이 잊혀 졌고, 기억이 잊히고, 마음을 잃었다.      </p>

<p><a href="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5000025294">김종삼</a>과 <a href="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0634614">김민정의 시</a>를 번갈아 읽는다. 김종삼의 시는 소리가 없다. 어디선가 북소리가 들려올 것도 같았지만, 피아노 반주도 변사도 없는 무성영화처럼 펼쳐진다. 그래도 말은 그림이 된다. 김민정의 시는 끊임없이 조잘대는 말들이 좀처럼 여백을 만들어 내지 않고 있다. 그의 수다는 북적이는 선술집의 성가신 소음이 아니라 주변적인 것들에 무게를 두고 반짝이고 있다. 뻥긋하는 금붕어라니, 천만에 '반짝거리는 수다'이다. 이런 수다!  </p>

<p>좀처럼 우아하지 않게 그러면서 말하기 거북했던 것들을, 쓸데없다고 믿던 것들을 아무렇게나 혹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토해내고 있다. 옆자리의 통화를 엿듣는 모양새로 그의 시를 읽고 있자면 아니꼽살스럽다는 듯이, 말들은 확성기를 들이댄 야채장수처럼 소리 지르고 있다. 그의 말들은 가볍지만, 그로 상상력은 경계를 넘어 나긋하다. 겨울 햇살이 일요일 오전을 비추듯이, 손을 뻗으면 눈이 부셔 살짝 찡그리는 나긋함. </p>

<p>거기에서는 언어가 시를 통해서 새롭게 표상되는 것이 아니라 '시'도 일상의 언어들의 지루한 반복일 뿐이다. 비로소 나부대던 궁상들도 세계의 중심이 되고 더 이상 주변적인 것은 어디에도 없다. 수다는 말로, 말은 마음으로 간다. 그렇게 엮여도 시가 되는 걸 알았다. 17년 전에도,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는 끊임없이 수다를 떨었을 게다. “국어 선생이 말이지, 술이 떡이 돼서..... ”</p>

<p><!--김종삼과 김민정의 시를 번갈아 읽었다. 김종삼의 시가 흑백의 무성영화를 보는 듯 소리 없이 아름답다면 김민정의 시는 끊임없이 조잘대는 말들이 좀처럼 여백을 만들어 내지 않고 있다. 그의 수다는 북적이는 선술집의 성가신 소음이 아니라 주변적인 것들에 무게를 두고 반짝이고 있다. 뻥긋하는 금붕어라니, 천만에 '반짝거리는 수다'이다. <br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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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처럼 우아하지 않게 그러면서 말하기 거북했던 것들을 아무렇게나 혹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토해내고 있다. 옆자리의 수다를 엿듣는 모양새로 그의 시를 읽고 있자면 아니꼽살스럽다는 듯이, 말들은 확성기를 들이댄 야채장수처럼 소리 지르고 있다. 그의 말들은 가볍지만 그로 상상력은 경계를 넘어 나긋하다. <br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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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서는 언어가 시를 통해서 새롭게 표상되는 것이 아니라 '시'도 일상의 언어들의 지루한 반복일 뿐이다. 비로소 나부대던 궁상들도 세계의 중심이 되고 더 이상 주변적인 것은 어디에도 없다. <br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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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전에 깨철님 댁에 다녀왔다. 이번에 낸 책을 &quot;증정&quot; 받으려고 간 것이지만 그의 책은 손에 잡히지 않고 고양이들만 내내 눈에 밟힌다. 초롱, 태양, 샤샤 그리고 밤비, 아, 이뻐 죽겠다. 고양이 네 마리와 함께 산다면 세상을 나 몰라라 해도 무죄다! 나도 고양이를 키우고 그들이 나를 키웠으면 싶다. 누가 분양해 준다면 그'들'과 함께 온 마음을 다해서 세계를 나눌 텐데, 누구? ;) <br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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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리다 마는 비는 질색이야, 주구장창 쏟아져라.--></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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